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15강(눅22:54-6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3. 15:50

누가복음 강해 215(22:54-6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9()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에 대하여(22:54-62)

 

의사 누가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앙망하느냐? 아니면 버리고 떠나느냐? 따라서 삶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하고 있습니다(22:54-62). 그와 같은 의사 누가의 주제의식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우선적으로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을 배척하고 처형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인물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가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정죄하게 됩니다(14:53-65, 22:66-71). 하지만 구성원 모두가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을 주장하고 있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인물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입니다(3:1-10, 7:50-52, 19:38-42).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산헤드린 공회에서 극소수일 뿐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그저 마음속으로만 예수님을 지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2)   둘째, 현임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는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유대교의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실세입니다. 이유는 가지입니다; 첫째, 그는 헤롯 왕가가 아니라 주후 6년경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총독 구레뇨(2:2, Quirinius) 처음으로 직접 임명한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현임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교활하게도 궂은 일은 장인 안나스를 이용하여 처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배경사를 살펴봅니다;

1)      헤롯 대왕 때부터 예루살렘성전은 헤롯 왕가가 지배했으며 대제사장 역시 헤롯 왕가에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헤롯 아켈라오가 폭정을 일삼자 유대인의 대표들이 시리아 총독과 로마황제에게 진정을 합니다. 결과 주후 6년에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시리아 총독 구레뇨에게 헤롯 왕가의 아켈라오를 폐하고 직접 땅을 로마의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구레뇨는 먼저 대제사장을 교체합니다. 구레뇨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력한 아론의 후손인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유대교의 교권을 맡기게 것입니다.

2)      막강한 대제사장 안나스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것은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주후 14년에 죽고 2 황제인 티베리우스가 즉위한 다음해인 주후 15년입니다. 신임 예루살렘총독으로 부임한 그라투스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대제사장 안나스를 파면하고 자리에 3명의 대제사장을 복수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가 교묘하게도 총독 그라투스에게 로비를 하여 주후 18년에 단독으로 대제사장이 됩니다.

3)      가야바는 자신의 대제사장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첫째, 그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주후14-37)에게 대제사장을 자주 교체하거나 복수로 두게 되면 부패와 착취가 심하여 유대인들이 고통스럽다고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의 로비가 주효하여 티베리우스는 시리아총독에게 대제사장을 자주 교체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주후 26년에 부임한 예루살렘총독 빌라도는 대제사장 가야바를 자리에 계속 두게 됩니다. 둘째, 그는 권력욕이 남다른 장인 안나스를 막후실세의 자리에 둠으로써 자신의 대제사장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황제 티베리우스가 죽고 나자 주후 37년에 가야바는 마침내 대제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3)   셋째, 그와 같이 영악한 가야바이므로 그는 장인 안나스의 영향력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대제사장 자리를 오래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장인 안나스를 적절하게 이용함으로써 유대교지도자들의 잘못을 규탄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쉽게 처리해버리고자 합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막후실세인 안나스가 자신의 종들을 많이 끌고가서 예수를 감람 산에서 은밀하게 체포하는데 일조를 합니다(22:52,대제사장들과”). 그리고 아예 예수를 자신의 저택으로 끌고 와서 개인적으로 심문을 합니다(18:12-13, 24). 저택의 안뜰에까지 은밀하게 들어온 사도들이 바로 요한과 베드로입니다(18:15-16).

(4)   넷째, 베드로는 감람 산에서 칼을 휘둘러 안나스의 종인 말코의 귀를 떨어뜨린 장본인입니다(18:10). 사실을 안뜰에서 함께 불을 쬐고 있던 집의 하인들이 알고서 세번 신원확인을 하고자 합니다(22:56-60). 그때마다 베드로가 부인을 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자리를 모면하고자 합니다. 특히 의사 누가는 사도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스승이신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관계를 부인하고 있는 현장을 예수님께서 안채에서 눈길을 돌려 바라보고 계신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22:61).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5)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슬픈 눈으로 여전히 베드로를 바라보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겠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린 목숨으로 남은 인생 가운데 과연 무엇을 수가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베드로가 기껏 갈릴리의 어부로 다시 돌아갈 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21:3).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들을 찾아오셔서 40일간 재교육을 하게 되자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은 다시 달라지고 있습니다(21:4-19, 1:3-8).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한 사도로서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초대교회를 건설하게 되는 것입니다(28:18-20, 24:44-53, 2:36-47).

위와 같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사람들이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가운데 앉았더니”(22:54-55);

(1)   여기서의 대제사장의 집은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이 아니고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저택입니다. 사실을 나중에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자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18:12-13). 이에 따라 예수님을 멀찍이 뒤따라가고 있던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안나스의 저택의 뜰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22:54, 18:15-16). 그것은 순전히 사도 요한의 집안이 안나스의 집안과 평소에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사실로 보입니다(18:15). 예를 들면,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는 비록 갈릴리에 살고 있지만 아론의 후손이며 특히 집안이 안나스와 매우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겠습니다.

(2)   그런데 문제는 그날 안나스가 자신의 하인들을 많이 거느리고 감람 산으로 가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자신의 저택으로 먼저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밤의 냉기를 피하여 뜰에서 베드로와 함께 불을 쬐고 있는 안나스의 하인들이 그날 밤에 감람 산에서 발생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22:55-59). 특히 사도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서 자신들의 동료인 말코의 귀를 떨어뜨린 사건을 너무나 알고 있습니다(22:50, 18:10). 따라서 안나스의 뜰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위기가 세번이나 찾아오게 됩니다.

둘째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사람도 (예수)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22:56-58);

(1)   첫번째 시험은 힘이 약한 여종으로부터 오고 있습니다. 여종은 매우 활달한 성격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날 감람 산으로 출동하는 여러 하인들과 함께 행동을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친한 동무 말코의 귀가 사도 베드로에 의하여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곳에서 칼을 휘두른 사람의 인상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불빛에 비치는 베드로의 얼굴을 보고서(22:56a) 즉석에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 사람도 (예수) 함께 있었느니라”(22:56b). 연약한 여종의 증언에 대해서 천하의 대장부인 베드로가 무기력하게도 거짓말을 하게 되는 비참한 일이 자리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22:57).

(2)   두번째 시험 역시 연약한 여종으로부터 오고 있습니다. 의사 누가는 단지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22:58)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와 사도 마태는 그들의 복음서에서 다른 사람이 바로 또다른 여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26:71),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사람은 도당이라 하되”(14:69). 한갓 여종의 증언 앞에서도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스승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불쌍한 사도 베드로입니다(14:70, 22:58).

셋째로, 시간쯤 있다가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울더라”(22:59-60);

(1)   세번째 시험은 부인하기가 가장 힘듭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말코의 친척인 남종이 그날 감람 현지에서 함께 있다가 자신이 목격한 베드로의 인상착의에 비추어 그가 틀림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8:26). 남종의 증언에 따라 베드로의 곁에서 함께 불을 쬐고 있던 안나스의 종들이 모두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대목을 마가와 사도 마태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도당이니라”(14:70),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도당이라.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26:73).

(2)   증거가 확실하여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입니다. 그러한 진퇴양난의 죽음의 위기를 빠져나오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가 마지막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승이신 예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의사 누가와 사도 요한은 정도로 심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22:60, 18:27) 마가와 사도 마태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14:71),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울더라”(26:74).

(3)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벧전5:13). 그는 영적인 아버지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대필하면서 그로부터 예수님의 생애와 사도들의 공생애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의 복음서에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 베드로가 세번째로 부인하고 있는 대목은 사도 베드로의 참회의 기록이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뼈가 저리게 당시의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목숨을 살리겠다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저주한 베드로입니다. 그러한 베드로 자신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초대교회를 개척하는 사도로 사용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는 은혜를 영적인 아들 마가를 통해서 세상에 복음으로 내놓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오늘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2:61-62);

(1)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자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자리를 벗어나고자 사력을 다하고 있는 베드로의 귀에 새벽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22:60). 그리고 동시에 안채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눈에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긍휼의 눈망울이 들어 오고 있습니다(22:61a). 순간 베드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대문 바깥으로 도망을 나와서 그만 골목길에서 통곡을 하고 맙니다(22:62).

(2)   베드로의 머리속에서는 가지의 영상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자리까지 예수님을 수행하여 목숨을 걸고 지켜드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자신의 모습입니다(22:33). 하나는 베드로의 내면적인 연약함을 아시고서 오늘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나를 모른다고 세번 부인하게 것이라는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장면입니다(22:34). 결국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미래지사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베드로가 모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깊이 알고 계십니다.

(3)   결국, 베드로 자신이 틀렸으며 예수님께서 옳으신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 자신은 천하에 아무 쓸모가 없는 비겁자이며 유한한 인생을 살다가 그렇게 아끼던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한탄과 회한 가운데 숨을 거두게 것입니다. 그런데 안나스의 저택을 빠져나오면서 마지막 순간에 쳐다본 예수님의 동정의 눈빛만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3 6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던 동년배 스승이며 친구인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승님을 저주하면서 목숨을 살리겠다고 거짓 맹세를 하고 있는 자신을 보시고서 아무런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전부 긍휼하게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눈빛입니다. 눈빛을 떠올리면서 베드로는 자기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얼마나 통곡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에서 결코 치유할 없는 자책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무덤에서 부활한다는 부활의 의미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당장 세상에서 필요한 부활의 의미와 능력은 사도 베드로와 같은 자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작업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21:15-19).

훗날 사도 요한이 마태, 마가, 누가 등이 저술한 3권의 공관복음을 보완하기 위하여 4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도 요한은 21 마지막 장을 할애하여 베드로와 7명의 사도들을 찾아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로 오신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그들을 목자로 임명하십니다. 그들을 복음의 사역자로 재기용하여 초대교회의 역사를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남은 인생 가운데 체험하는 영적인 부활의 의미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살길을 찾아 갈릴리로 떠난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다시 한번 새로운 인생, 목자의 인생을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은혜가 놀라와서 사도 베드로는 보은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쓰러진 자를 다시 일으키셔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