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16강(눅22:63-6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4. 04:22

누가복음 강해 216(22:63-6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10()

 

예수님을 불법 심문하고 있는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 그리고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는 그의 수하들에 대하여(22:63-65);

 

밤중에 감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이 가룟 유다를 앞장 세워서 끌고 무장세력들에게 순순히 체포를 당하십니다. 그리고 새벽이 밝아 오기 직전에 대제사장 가야바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모인 장소로 끌려가시게 됩니다. 그곳에서 종교재판을 받으시고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가 되십니다. 따라서 사형집행권한이 없는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끌고서 로마총독인 빌라도를 찾아가서 십자가처형을 요청하게 됩니다.

4복음서에 적혀 있는 공통적인 사항을 위와 같이 요약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가운데 심각한 가지의 다음 질문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한밤중에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끌려가셨으며 새벽에 산헤드린 공회의 정식심문이 있기 전까지 누구에게 어떠한 일을 당하신 것일까요? 둘째, 새벽 닭이 울기 전까지 사도 베드로가 스승이신 예수님을 세번 모른다고 부인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발생한 일일까요?

가지 질문에 대하여 답을 찾기 위하여 4복음서를 검토해보면 결과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도 마태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서 유대교지도자들이 한밤중에 예수님을 체포하여 곧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으로 끌고 갔다고 적고 있습니다(26:55-57). 그곳에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밤새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였으며(26:57-68) 새벽에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7:1-2). 이에 따라 다음 가지의 사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를 당하실 사도 마태 자신을 포함하여 사도와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것입니다(26:56). 하나는, 사도 베드로가 스승님을 세번 부인한 장소가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이라는 것입니다(26:58, 69-75). 과연 사도 마태의 기억이 확실한 것일까요?

(2)   둘째,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로 불리고 있는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를 참조하면 사도 마태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습니다.

1)      왜냐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를 당하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14:50)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마가 자신도 당시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체포조가 자신을 붙잡고자 하자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자신의 어린시절의 경험을 진술하고 있습니다(14:51-52). 그의 경험은 사도와 제자들이 당시 도망친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14:50).

2)      다음에 체포조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갔는데 그곳에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이더라”(14:53) 마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대제사장은 산헤드린 공회의 소집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현직인 가야바라고 하겠습니다.

3)      마가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 대제사장의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인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인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14:54). 그러므로 저택은 가야바의 집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14:66-72).

(3)   셋째, 의사 누가가 당시의 증거와 증언을 독자적으로 수집하여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는 상당히 다릅니다.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마태와 마가와 누가의 복음서를 일컬어 공관복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점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누가는 예수님을 체포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행위가 불법적인 것이며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특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22:53). 의사 누가는 자신의 경험이나 사도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수집한 많은 증거들을 정리하여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자료가 어떠한 의미를 주고 있는지를 알기 쉽게 위와 같이 마디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의사 누가는 밤이 지나고 날이 새자 산헤드린 공회가 열리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22:66).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의 체포로부터 산헤드린 공회가 열리기 전까지의 상황에 대하여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사도 베드로도 멀찍이 따라가 뜰에서 하인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2:54-55). 둘째, 밤에 뜰에서 베드로는 하인들이 자신을 알아보고서 나사렛 예수의 도당이라고 증거하자 그것을 세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22:55-62). 셋째,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밤새도록 희롱과 모욕을 당하고 계십니다(22:63-65). 대목이 오늘 다루고자 하는 강해의 본문입니다.

3)      여기서 의사 누가가 주장하고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체포과정과 심문과정 등이 모두 불법적이며 어두운 권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둘째,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믿음의 타락을 보이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밤새 오만한 무리들에 의하여 각종 희롱과 욕설에 시달리게 되십니다.

(4)   넷째, 의사 누가의 복음서가 세상에 나온 것이 주후 60년대입니다. 물론 마가의 복음서가 조금 일찍 나왔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저술이 되고 초대교회에 회람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과정에 있어서 위와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을 바로잡을 필요성이 있습니다. 작업을 훗날 사도 요한이 수행하여 4복음서를 작성하여 주후 90년대초에 초대교회에 회람을 시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한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들이 곧바로 전직 대제사장이며 유대교의 막후실세인 안나스의 저택으로 끌고 갑니다(18:12-13). 집에서 현직 대제사장도 아닌 안나스가 불법적으로 예수님을 심문합니다(18:19-23). 심지어 안나스의 수하는 예수님을 부당하게 구타하기도 합니다(18:22). 후에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보내어진 것으로 사도 요한이 바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18:24).

2)      사도 베드로는 유대교의 막후실세인 안나스의 집안사람들과 알고 있는 사도 요한의 도움으로 집의 뜰에 함께 들어가게 됩니다(18:15-16). 그런데 불행하게도 집의 하인들이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들을 향하여 칼을 휘두른 사실이 있는 베드로의 인상착의를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도당이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 집의 여종과 남종에 의하여 난처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집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는 사도 베드로입니다(18:17, 25-27).

3)      그런데 사도 요한은 묘하게도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안나스의 하인들에 의하여 몰래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보내어진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18:24).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강력하게 자신은 그를 전혀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를 쳐다보셨다고 하는 의사 누가의 진술이(22:61)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4)      이미 현장을 떠나신 예수님께서 육신적인 눈으로 베드로를 애처롭게 쳐다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스승님을 저주하면서 자신의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강력하게 그를 부인하고 있는 자신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벌써 아시고서 예언을 해주신(22:34) 예수님의 동정의 눈망울을 순간 영적으로 다시 떠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22:61-62). 그것은 비록 환상적인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영혼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심장에 내리 꽂히고 있는 비수와 같은 것입니다(14:26, 1:13, 4:12).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사도 도마에게 하신 다음 말씀은 새삼 되새기어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참고하여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지키는 사람들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22:63); 의사 누가는 밤새 대제사장의 집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실을 저택의 안과 바깥의 뜰로 나누어서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바깥의 뜰에서는 4 중순 유월절 밤의 추위를 물리치기 위하여 하인들이 나무 장작으로 불을 피워서 그것을 쬐고 있습니다. 자연히 불가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22:55). 자리에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끼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녀 종들이 사도 베드로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날 감람 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말코(Malchus) 향하여 칼을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칼날에 말코의 오른쪽 귀가 땅으로 떨어지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시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22:50-51, 18:10). 여러 증인들의 고발로 위기에 빠진 사도 베드로는 3번이나 자신은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고 변명하면서 자리를 벗어나고 있습니다(22:58-62).

(2)   저택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계십니다. 평소에 그와 함께 다니던 12사도들이 모두 떠나가고 혼자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아무 것도 모르는 하인들이 예수님을 구타하고 희롱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그렇게 종들에게 맡겨서 고분고분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인권유린이며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죄입니다(1:26-27);

1)      구타를 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자신의 개를 채찍으로 때려서 길을 들이듯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구타하고 있는 하인들의 뇌리에는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나사렛 예수는 죄인이며 한갓 가축과 같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듣도록 길을 들이기 위해서는 매와 채찍질이 제격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가해자의 의식구조에는 매를 들고 있는 자신이 예수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라고 하는 오만과 교만이 무의식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상대방을 죄인이며 불의한 자라고 욕함으로 해서 자신이 반사적인 이익으로 의인이라고 여기게 되는 유치한 인간의 심리상태와 동일한 것입니다.

2)      희롱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폄하하고 놀리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지난 3 이상 놀라운 선지자로 평판이 자자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대제사장이 자신들에게 맡겨서 길을 들이라고 하는 한갓 죄인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실컷 놀려먹을 수가 있습니다. 밤도 길고 한데 선지자를 놀려 먹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그것이 지각이 없는 대제사장의 하인들의 심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하라. 너를 자가 누구냐 하고”(22:64);

(1)   의사 누가는 참으로 재미있는 희롱의 가지를 대표적으로 여기에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의 하인들이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중의 하나가 세게 예수님을 때리고 나서 누가 자인지를 한번 맞추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22:64). 죽은 자를 살릴 있는 능력자라고 한다면 정도는 간단할 터이니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부답이십니다.

(2)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길로 예수님께서 입을 굳게 다무시고 이미 가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깎는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6-7).

셋째로,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22:65);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유대교의 막후 실세인 안나스로부터 불법적인 심문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18:13, 19-24). 가운데 하나가 하인들을 시켜서 예수님을 구타하고 희롱하는 것입니다(22:63, 18:22). 그리고 이루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많은 욕을 퍼붓는 것입니다(22:65).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순간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유대교지도자들과 그들의 하인들에 의하여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모욕과 능욕을 참으시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이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이 되시는 관건이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5-11).

따라서 예수님처럼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의 영광을 얻기를 소원하고 있는 성도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고난의 길을 통과해야만 것입니다. 고난의 특징을 본문에서 희롱, 구타, 욕설이라고 의사 누가가 적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고난을 예수님처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비교할 없는 영생의 영광에 참여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