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03강(눅21:29-3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6. 17:08

누가복음 강해 203(21:29-3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1 27(주일)

 

무화과나무가 계절을 쫓아 무성해지듯이 그렇게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21:29-33)

 

본문에서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비유가 의미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묵상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초지식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1)   첫째, 의사 누가는 지역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 나무를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사 누가는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올라간 나무를 돌무화과나무라고 적고 있습니다(19:4). 그리고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동산을 감람원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올리브나무가 무성하다는 뜻입니다(19:29). 또한 예루살렘에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적고 있습니다(20:1, 21:20, 29). 그것은 예루살렘에는 무화과나무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무를 가지고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고도 있습니다.

(2)   둘째, 의사 누가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가지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의 시기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 모든 나무를 보라”(21:29)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에게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종말로 여겨지는지 몰라도 이방인들에게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그들에게 익숙한 다른 나무에서 싹이 나고 여름이 오듯이 그렇게 종말의 시기가 달리 다가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주후 32년경 예수님께서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신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38 후에 예루살렘성이 로마의 원정군에 의하여 포위가 되고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이 마치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것처럼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줄로 알라.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21:31-32) 예언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알고 있습니다(벧후3:9, 3:11, 22:7, 12, 20). 그것은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와 같은 맥락입니다(2:3).

(4)   넷째, 하지만 의사 누가는 무화과나무이외에 모든 나무를 보라”(21:29) 언급함으로써 위와 같은 단기적인 시관(時觀, view of time, 시기와 때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3-14)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자연 아나니”(21:29-30);

(1)   하나님은 영이십니다(4:24). 인간이 육신적으로 갇혀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전부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의 섭리를 피조물인 인간이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있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들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바로 비유와 상징들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에서는 선민과 이방인들에게 종말의 징조를 설명하고나서 그때가 언제인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를 동원하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1:29a).

(2)   비유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무는 두가지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무화과나무입니다(21:29b). 둘째, 모든 나무입니다(21:29c). 의미를 살펴봅니다;

1)      의사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하시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마가와 사도 마태 역시 그들의 복음서에서 동일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13:28, 24:32). 그리고 마가와 사도 마태는 가지 기사를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셨다는 것입니다(21:18, 11:12). 따라서 길가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하십니다(11:13a, 21:19a). 그러나 아직 봄철이라 열매가 없어서 얻지를 못하시자 그만 저주를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11:13b-14, 21:19b)”.

2)      의사 누가 뿐만 아니라 마가와 사도 마태 모든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무화과나무가 예루살렘이나 근방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가지고 선민들에게 종말에 관한 예언을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특히 예루살렘성의 장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으며 선민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임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의사 누가는 마가나 사도 마태와는 달리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21:29b)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종말의 계시까지 하시고 계심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가 예루살렘과 선민을 상징하고 있다면 모든 나무는 이방인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이 예루살렘의 장래역사로 말미암아 종말을 짐작하는 것처럼 이방인들도 자신들의 수도의 운명을 가지고 세상의 종말을 바라볼 것입니다.

(3)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자연 아나니”(21:30); 예수님께서는 먼저 모든 사람들이 있도록 자연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무는 봄철이 되면 싹이 나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자연의 흐름을 짐작하게 됩니다. 금년에도 봄이 되자 나무에 싹이 나왔으니 이제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년에도 전해에도 계속 경험하고 있는 자연의 현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계절의 순환과 나무의 생장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자연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가 함께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떠한 영적인 섭리일까요?

둘째로,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줄을 알라”(21:31);

(1)   예수님께서는 이미 설명한 있는 것들 종말에 선행하고 있는 여러가지 징조들을(21:10-13, 20-28) 본문에서는 알기 쉽게 나무의 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1:30a). 그러한 징조들이 있으면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마치 봄에 나무의 싹이 트게 되면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를 맺게 되는 여름이 오게 되는 자연의 이치처럼 자명한 것이라는 비유적인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2)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21:31b). 그런데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하여 선민들의 생각과 이방인들의 생각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이 상당히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1)      선민들은 다윗대왕의 후계자가 메시아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해주는 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메시아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루살렘이 적군에 의하여 포위를 당하고 성과 성전이 모두 붕괴가 되고 마는 미래가 연출이 된다는 예수님의 예언입니다(21:20-25). 그렇다면 그것은 선민들에게 있어서는 절망적인 세상의 종말에 해당이 됩니다.

2)      선민들이 적군들에 의하여 장차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멸망을 맞이하고 그것을 세상의 종말처럼 여긴다고 하여 이방인들이 팔짱을 끼고서 마냥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잔을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차례로 마시게 하시기 때문입니다(25:29).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선민과 이방인들이 모두 구원을 받아 영생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선민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러한 정치적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저 로마제국이나 헤롯 왕가를 물리치고 유대인들의 제국을 건설하여 선민의 영광을 세상에 떨치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과 죽음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부활과 영생을 얻는 성도들이 있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상징과 같은 것입니다(고전15:21-24). 그러므로 예수님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완전한 세상의 종말의 징조를 보게 되면 영생의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고서 모든 인류가 전부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셋째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1:32-33); 부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21:32a); 예수님께서 진실로라고 전제하고서 말씀하시는 경우는 첫째, 그것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 영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으므로 깊이 묵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21:32a) 다음에 기술이 되고 있는 이야기에 대하여 깊이 묵상을 하고 다각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21:32b); 특히 세대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첫째,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평균생존연령이 40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40년이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주후 32 4월경에 돌아가시고 38년이 지나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대에 의하여 망하게 됩니다. 선민들은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을 일종의 종말로 여기게 됩니다.

2)      둘째, 세상의 종말은 주후 70년이 아니라 수천년 후에 있을 있는 일입니다. 이유는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후 1948년에 팔레스틴 땅에 재건이 현대 이스라엘과 그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미래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예루살렘 도시가 다시 적군에 의하여 포위되는 시기가 언제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종말적인 징조의 하나가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3)      셋째,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종말만큼 중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과 정체성이 사라지는 임종을 개인적으로는 종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육신을 벗게 되면 다음은 영혼만이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시간이 함께하게 됩니다. 빠르기에 대해서는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1:33);

1)      사람들의 역사관은 순환적인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이 된다는 관념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역사관은 직선입니다(11:36). 시작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의하여 반드시 종말을 맞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죽어서 잠자고 있는 자들까지 모두 일단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아니면 영원한 처벌에 들어가느냐가 결정이 것입니다(25:31-46, 5:25-29).

2)      그와 같은 성경의 역사관이 예수님에 의하여 본문에서 다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화과나무를 비롯하여 모든 나무에서 봄에 싹이 트면 그것이 자라 장차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를 맺게 되는 여름이 오게 된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말의 싹이 징조로서 선을 보이게 되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이 정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1:33).

결론적으로,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상의 종말보다는 자신의 종말을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세상의 종말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을 너무 강조하고 그것에 집착하다가 보면 때로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로 하루하루를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이 소홀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평생을 신실하게 살아간 성도는 언제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영생구원을 얻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윗의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고 시온의 영광을 세상에 다시 떨치는 것이 소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도 그때에 실현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민들에게 있어서 멀지 아니한 장래에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성이 포위가 되고 유대 땅이 멸망을 당하고 만다는 예언은 세상의 종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이방인들의 나라가 망하게 되는 역사가 전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주후 20세기 중반에 기적처럼 재건이 현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 도시의 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대가 문제입니다.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성도로서 거룩하게 살아간다면 세상의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현명한 신앙생활이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