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00강(눅21:16-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5. 17:20

누가복음 강해 200(21:16-1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1 20(주일)

 

성도들의 믿음생활에 대하여 집안의 반대와 친지들의 고발, 그리고 사회적인 미움이 극심해지면 어찌되는가?(21:16-19)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서에 기록이 되고 있는 선지자 엘리야 시대의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우상숭배의 모습과(왕상19:1-4)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는 의인 7천명의 기사를(왕상19:18-21) 되돌아 보게 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21:16-19). 어째서 그런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바알을 섬기고 있는 제사장이며 시돈의 왕인 옛바알 딸이 이세벨인데 그녀가 북조 이스라엘의 아합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바알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고 맙니다(왕상16:30-33). 아합 왕은 아내 이세벨과 더불어 부왕(父王, 아버지 ) 오므리가 천도한 새로운 수도 사마리아를 아예 바알을 섬기는 중심도시로 만들고 것입니다(왕상16:23-33). 그러한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길르앗의 시골 디셉 사람 엘리야를 선지자로 삼아,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백성들을 격려하여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이도록 만듭니다(왕상18:19, 36-40).  또한 엘리야가 기도를 하자 비가 내려서 오랜 가뭄의 세월이 그치도록 해주지만(왕상18:41-46) 효과도 잠시입니다. 아합의 왕가와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문화에 빠져들고 것입니다(왕상16:31-34).

(2)   둘째,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또다시 자신들의 지극히 이기적이고도 현세주의적인 소원을 이루고자 우상문화에 빠져들자 틈을 타서 이세벨 왕비는 군대를 동원하여 차제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왕상19:1-2). 엘리야는 이세벨의 체포령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지만 넓은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자신의 하나 은닉시켜줄 하나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왕상19:3a). 가까운 부모형제와 친지들까지 모두 이기적인 바알 신앙에 빠져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버렸기 때문입니다(21:16-17). 결과 엘리야는 하나님신앙이 살아 있는 다윗왕조의 나라 남조 유다 왕국으로 피신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왕상19:3b).

(3)   셋째, 가나안 남부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선지자 엘리야는 실로 기가 막힙니다. 어떻게 넓은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그것도 시골 길르앗의 일가친척과 죽마고우(竹馬故友,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서 함께 놀이를 하던 어릴 적부터의 오랜 )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인 자신을 보호해주지 아니한 것일까요?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기 혼자 살아남아서는 조국의 미래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왕상19:4). 차라리 마지막으로 하나님신앙을 보전하고 있는 의인인 자신이 죽게 되면(왕상19:10) 하나님께서는 안심하시고 죄인들만이 살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심판을 내리고 것입니다. 그리하면 심판 다음에 새로운 조국의 미래가 열리지나 않을까요? 그러한 생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황량한 브엘세바(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의 맹세의 우물이 있는 , 21:31, 26:33, 예루살렘에서 약간 남서쪽으로 직선거리70km지점임)에서 죽기를 소원하고 있는 엘리야입니다(왕상19:4).

(4)   넷째, 절망에 사로잡힌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살려서 하나님의 호렙으로 인도하십니다(왕상19:5-8). 그곳에 나타나신 여호와께서는 북조 이스라엘에 바알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는 의인 7천명을 보호하시고 나라를 새롭게 하실 계획이심을 엘리야에게 알려주십니다(왕상19:9, 18). 그러므로 선지자 엘리야에게는 엘리사를 생도로 삼아 양육하여 선지자로 세우고 은퇴할 준비를 하라고 하십니다(왕상19:16b). 또한 아합 왕가를 끝내기 위하여 군대장관 예후를 왕으로 세우는 일과 아람왕국의 벤하닷 왕의 신하 하사엘에게 왕이 된다는 예언을 주어 궁중모반을 하게 하는 등을 엘리야에게 사명으로 주시지만(왕상19:15-16a)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엘리야는 요단 강가에서 승천을 하게 됩니다(왕하2:1, 11). 따라서 남은 일들은 전부 선지자 엘리야가 양성한 새로운 영적인 지도자들의 사명으로 넘어가게 됩니다(왕하2:3, 5. 7, 15, 8:7-15, 9:1-10).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이며 새로운 역사의 섭리입니다.

(5)   요컨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공모하여 북조 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우상의 나라로 전락시키고 있는 바로 그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절망하고 있는 선지자 엘리야의 뒤를 이어서 새로운 선지자 7,000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조국의 미래를 두고서 엘리야와 같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야보다도 더욱 많은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미래를 살리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4:10-11). 다음의 역사는 차세대의 선지자들에게 맡기고 그들이 사명을 감당할 있도록 만들어주면 됩니다. , 사도와 제자들은 그들을 생도로 맞아서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으로 훈련을 시키고 하나님의 선지자로 양성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을 행한 다음에는 선지자 엘리야처럼 하늘로 돌아가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21:16);

(1)   언뜻 보면,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부모와 형제가 성도들을 잡아서 박해자들에게 넘겨줄 수가 있을까요?(21:16a) 그렇지만 선지자 엘리야 시대의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실정을 짐작해보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종교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극단적인 공산주의 사회에서 부모와 형제들이 기독교인인 가족을 당국에 고발하고 각기 살길을 모색하고 있음을 때에 예언의 정확성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버젓이 그러한 고발과 인민재판에 회부하는 자아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기타 친척과 벗들이 그렇게 행하는 것은 쉽다고 하겠습니다(21:16b).

(2)   주후 19세기 후반에 조선사회에 있어서는 대원군이 서양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쇄국정책과 더불어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죽이는 반인권적인 정책을 시행합니다. 결과 많은 선교사와 성도들이 밀고를 당하여 관청에 붙잡혀가게 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많은 무리가 보고 있는 가운데 공개처형이 되고 맙니다. 국가 공권력이 눈을 부릅뜨고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고 있는데 특히 친지들의 협조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회적인 분위기가 기독교의 침투를 싫어하면서 성도들을 잡아서 관청에 넘기기를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관청에 끌려간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참형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예언하십니다(21:16c). 실제로 사도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훗날 헤롯 아그립바1세의 탄압이 있지만 사도 야고보만이 참수가 되고 나머지는 피신을 하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12:1-17).

둘째로, 너희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21:17-18);

(1)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는 복음사역을 반대하는 자들이 주로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20:1, 19, 27).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사상이 선민만의 구원과 현세적인 복락을 얻고자 하는 유대교의 가르침과 어긋나고 있기 때문에 배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장차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21:17). 그러한 미움은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오고 있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이 다스리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교회와 성도에 대한 박해가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나아가서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가 됨에 따라 원주민들의 토착신앙과 마찰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회교권을 비롯한 다른 종교권으로부터 엄청난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염두에 두시고서 조금도 겁을 내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두터운 보호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십니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21:18). 말씀은 벌써 말씀하신 참새 이야기 재확인이므로 효력이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참새 5마리가 2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되지 아니하는 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세신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2:6-7).

셋째로,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끝까지 세상적인 미움과 박해를 성도의 인내로써 이겨내라고 하십니다(21:19a). 여기서 인내’(忍耐, 참고 견디는 )라고 하는 것은 자신과 세상의 형편을 먼저 바라보고 견디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아무리 암담하고 어렵더라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지금도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역사를 섭리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끝까지 믿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겉으로 보면, 세상은 사탄과 악한 영들에게 장악이 되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세상을 다스릴 있는 권세를 완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받았기에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4:5-6).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가 없는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진작에 밝히신 바가 있습니다(4:8). 그러한 악한 영들의 거짓이 완전히 드러나고 성도들에게 진리의 승리가 오게 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3)   영적인 승리를 바라보고서 육신적인 어려움과 환난을 인내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당하게 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8:17-18).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나자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40 후에 승천하게 되시는 영광이 찾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24:1-12, 50-51). 예수님께서는 100 안팎만 사용하고 나면 그만인 육신을 벗고서 부활의 몸이라고 하는 영생의 몸을 얻으시고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보좌를 얻게 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오해와 비방 그리고 유대교지도자들의 박해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십니다. 이유는 그들을 원망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려서 함께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의 구원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께 맡기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고난과 비교할 없는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얻게 것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성도의 삶이 어떠하여야 한다고 자신의 거듭난 삶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 사도로 나선 사도 바울은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써 이기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갑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영광에 자신도 참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달려가라고 권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마음이 담겨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내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3:10-12).

그러므로 아무쪼록 구주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던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인내로써 믿음의 길을 완주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