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98강(눅21:5-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3. 21:27

누가복음 강해 198(21:5-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1 18()

 

예수님께서 선민들에게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예언하시다(21:5-9).

 

예루살렘성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성전 바깥이 아니라 성전의 뜰에서 수가 있습니다. 이유는 성전의 주위를 담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시선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장면은 성전의 뜰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21:5).

성전의 구조를 참조하면, 동쪽문을 열고 성전의 뜰로 들어서게 되면 먼저 이방인의 뜰이 있고 다음에 여인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인 미문’(美門, beautiful gate) 있으며 앞에 13개의 나팔모양의 놋쇠로 만든 헌금함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21:1). 미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앞에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 앞에는 성전의 본체인 성소와 지성소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모습이 아름답고도 웅장합니다.

헤롯 왕가가 선민인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46 동안 예루살렘성전을 증축하고 있다고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2:20). 그렇다면 성전의 어느 부분을 넓히고 있을까요? 그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건물이 아니라 성전의 뜰의 규모를 넓히고 담장과 문을 아름답게 꾸민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본래 솔로몬대왕이 주전 10세기에 예루살렘성전을 건축할 때에는 화려하고 장엄한 규모였습니다(왕상6:1). 그것을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 제국이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멸망시킬 때에 전부 불태워버렸습니다(왕하25:2-9). 그리고 주전516 페르시아 황실의 도움으로 재건이 2성전은 규모가 솔로몬성전에 비하여 4분의 1정도로 축소가 것입니다(1:3-4, 6:13-18). 그것은 페르시아 황실의 안녕과 복을 비는 사찰의 성격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은 규모를 본래의 크기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헤롯 왕가의 계획으로 보입니다(2:20).

계획에 산헤드린 공회가 적극 보조를 하고 있습니다. 보조금을 모으고자 성전의 수입을 다음과 같이 늘리고 있습니다; 첫째, 이방인의 뜰에 환전장사와 제물장사를 상인들에게 허가합니다. 이권을 주고 돈을 거두는 것입니다. 둘째, 성전의 미문 앞에 13개의 헌금함을 두고서 성전을 출입하는 백성들로부터 많은 헌금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교묘하게도 헌금의 사용처를 13개로 나누어 사전에 모금함에 적어 둡니다. 그리고 나팔모양의 놋쇠로 헌금함을 만들어 동전을 넣을 때에 짤랑짤랑 소리가 나도록 조치합니다. 그리하면 서로 경쟁적으로 남의 눈치를 보면서 동전을 많이 넣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로 액수를 모두가 짐작하게 되므로 체면 때문에 적은 양의 동전을 넣고서 돌아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들 보기에 의롭고 거룩하게 보이고자 애쓰고 있는 외식적인 율법사회의 약점을 이용하고 있는 (, half) 강제적인 모금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남의 시선 때문에 가난한 과부조차 하루의 생활비를 헌금하면서도 부끄러워서 머리를 숙이고 물러나고 있습니다. 장면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뜰에서 자신의 마음속 생각과 예언의 말씀을 21장에서 계속적으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름답게 보이는 예루살렘성전이 어째서 멸망을 당하게 되는지 이유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의 기본정신을 밝히고 있는 모세오경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예루살렘성전이 망하게 되는 다음 세가지의 요인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지성소는 여호와의 임재가 잠시 이루어지는 장소에 불과합니다(25:22, 왕상8:27-30).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성전의 지성소에서만 계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만드시고 모든 피조물을 관장하시는 여호와를(103:19) 자신들을 위한 일종의 호국신으로 제한하고 있는 선민주의 사상의 발로입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성전에 가두고 감히 독점하고자 합니다.

(2)   둘째, 하나님께서는 제단의 모습을 순박하고도 검소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20:24-26).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전을 최고로 화려하고도 웅장하게 짓고자 합니다. 그것은 옛날 애굽의 노예생활을 때의 고난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신적인 망각과 물질적인 표현양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3)   셋째, 여호와께 드린다고 하는 것으로 이웃사랑의 실천을 도외시하고 있습니다(7:10-13).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을 돌보고 생명을 살려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이웃사랑의 강령을 전혀 실천하지 아니하는 모습입니다(12:30-31). 그러한 잘못된 신본주의 고르반사상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성전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민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상 멸망은 정해진 수순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아름다운 헌물로 꾸민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하나도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21:5-6);

(1)   이미 알아본 그대로 예루살렘성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들 보고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건물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있는 그곳은 성전의 안입니다. 성전의 제일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건물은 다듬은 돌을 정밀하게 쌓아 올려서 아름답고도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유대교지도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건물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더하고 있는 자신들의 공로를 다음과 같이 은근히 뽐내고 있는 같습니다; “2성전을 증축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산헤드린 공회가 헤롯 왕가를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방법이 성전을 출입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재물인 고르반(7:11) 헌금을 많이 거두어서 예루살렘성전을 더욱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는 설명입니다”(21:5).

(2)   그러한 설명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기가 막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화려한 성전을 결코 원하지 아니하십니다(20:2, 24-26).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옛날 애굽의 고센 땅에서 행정도시 라암셋과 군사용 시설인 비돔을 건축하기 위하여 100 이상 노예와 같은 부역의 삶을 살아온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11-12). 다시는 그와 같은 세상의 제국의 노예로 하나님의 백성을 살게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만 스스로 타락하여 세속화되고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유대교지도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신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의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헤롯 왕가와 힘을 합쳐서 예루살렘성전을 외관상 화려하게 꾸미기에 정신들이 없습니다. 과부의 생계비까지 바치도록 헌금제도를 마련하고 있으면서도 과부를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때가 되면 완전히 붕괴가 되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21:6).

(4)   성전만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외식적인 화려함과 꾸밈만을 강조하고 있는 신앙인들이 또한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깊은 영적인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므로 구속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선민사상과 현세적인 자랑에 기초하고 있는 자신들의 신앙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식적인 신앙태도를 질책하고 있는 예수님을 미워하며 배척하고 죽이고자 합니다. 결과 끝까지 영적인 회개와 거듭남이 없게 되면 그들 모두는 육신과 함께 멸망이라는 종말을 맞이하게 것입니다.

둘째로,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21:7);

(1)   아름다운 예루살렘성전이 완전히 붕괴가 되고 마는 때가 언제일까요? 평소 예수님께서 예언에 능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엄청난 기적을 베푸시고 있는 놀라운 선지자라고 하는 사실을 유대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하고 있는 성전의 완전붕괴가 구체적으로 언제 발생할 것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21:7a).

(2)   그들 선민들은 수만 있다면 그러한 멸망을 면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사전에 멸망의 징조를 수만 있다면 대비책을 세우는데 크게 도움이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21:7b). 과연 징조가 무엇일까요?

1)      첫째, 예루살렘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는 징조는 유대교지도자들과 선민들이 회개를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주셨는데 아들을 몰라보고서 배척하고 있으니 자연히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멸망의 징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선민들에게 밝히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만민구원이며 영생구원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반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직 선민들만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현세적인 구원과 축복을 선민인 자신들에게 주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선민의 영광을 추구하는 한편 이방인들의 멸망을 원하고 있는 그것이 예루살렘의 멸망의 징조입니다.

3)      셋째, 하나님께 바친다는 명분으로 가난한 과부의 생계비까지 바치도록 헌금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생계와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그들의 헌금까지 거두어서 예루살렘성전을 증축하고 있으니 그것이 멸망의 징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21:8); 위와 같은 취지의 설명은 예수님께서 수시로 하신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가올 미래와 관련하여 특별한 징조 하나를 보충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첫째,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미혹자들이 장차 나타난다는 것입니다(21:8ab). 둘째,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무책임하게 선전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21:8ac);

(1)   스스로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이비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교계에서 정리를 하고자 총력을 기울여도 계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과학문명이 크게 발달하고 있는 20세기와 21세기에 전세계적으로 그러한 현상은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2)   종말의 때가 언제라고 이상하게 계산하여 결과를 발표하거나 또는 환상 가운데 날짜를 예언으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가오는 날을 대비하기 위하여 재물을 모으고 공동체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새로운 종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어긋나고 있는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지난 19세기 미국에서 발생한 다미선교회 20세기 한국에서 발생한 다미선교회 대표적입니다.

넷째로,난리 소요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되지 아니하리라”(21:9); 예수님께서 다음 가지의 내용을 예언으로 전해 주십니다;

(1)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두려운 소문들이 꼬리를 물게 됩니다(21:9ab). 사상유례(史上類例, 역사적으로 비슷한 경우) 없는 난리와 소요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난리는 무력충돌과 전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소요는 평화적인 시위이지만 규모가 쉽게 진압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적인 지역적, 종교적,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어 국가의 공권력으로도 쉽게 진압을 수가 없는 시위로 번지고 있습니다. 결과 공권력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기존의 국가적인 권위체계가 빛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사회는 무정부상태로 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마치 포스트 모더니즘’(超現代主義, post-modernism, 과학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현대주의가 권위를 잃어버리고 해체되면서 감성적인 그리고 초이성적인 경향을 모색하고 있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데 그것이 탈현대주의또는 초현대주의라고 번역할 수가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2)   그러한 무력충돌과 엄청난 시위가 연이어 발생하지만 그것을 궁극적으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21:9a). 왜냐하면 아직 그것이 종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21:9c).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진정한 종말이란 주님의 재림과 심판입니다. 그때에는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평생을 살아간 자는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25:34-40, 29). 반대로 살아간 자는 영벌의 심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자리에 세울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어떻게 보호해 주실까요? 비밀이 난리 소요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되지 아니하리라”(21:9) 말씀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도록 부활의 영을 임재시켜 주십니다(8:11). 성도들의 영적인 생명력이 종말의 심판이라는 종착역까지 계속이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의 은혜로 오른 쪽으로 분류가 되어서 영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쉽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다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1:27).

결론적으로, 선민들의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질 운명입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선민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장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입각하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사상을 받아 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성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선민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이 아니라 소박한 것입니다. 그리고 외양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속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가난한 과부의 생계비까지 바치게 하여 성전을 크게 짓는 것이 아닙니다.

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존과 생계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이웃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돌보고 살리는데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영생의 구원을 얻는 비결입니다.

아름다운 성전이 무너지고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지라도 그러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한 성도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이 되고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구가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많은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