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93강(눅20:27-3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30. 17:38

누가복음 강해 193(20:27-3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1 13(주일)

 

육신적인 관계는 물론 삶의 굴레까지 초월하게 만드는 생명의 부활에 대하여(20:27-36)

 

100 안팎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방법에는 크게 보아 세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 육신을 지니고 있는 다른 동물이나 생물들이 그러하듯이 사람들도 육신을 대물림하고자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이 나이가 들어 쇠퇴하고 죽더라도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자신의 형상과 유전자를 계속 살려서 영구한 세월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역사적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일본과의 마지막 해전에서 전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갑옷 속의 방탄용 흉갑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적의 흉탄에 자신을 노출합니다. 이유는 전장에서 죽기를 원한 것입니다. 살아남게 된다면 많은 내부의 적으로부터 고통을 받게 것입니다. 그보다는 나라를 지키다가 전사를 하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왜군을 영원히 물리친 장군으로 후세에 그의 이름과 생애가 생생하게 기억이 것입니다. 그는 역사적인 불멸의 존재로 남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3)   셋째,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는 영생의 존재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요? 영생부활의 문을 예수님께서 여시고 있습니다;

1)      내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지도자들의 음모로 기습적으로 한밤중에 체포를 당하시고 유대교의 최고재판소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죄가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총독에게 넘겨져서 처형이 되고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유대교지도자들의 승리입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남의 손을 빌려서 로마의 반역자로 처단하고 자신들의 선민사상과 민족종교인 유대교를 지킬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의 실패이며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이유는 모든 세상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고자 유월절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1:29) 대속의 제사를 십자가에서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선민 이방인 상관이 없이 누구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3)      그렇게 영생구원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여 40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직접 부활의 몸으로 가르쳐 주십니다(1:1-11). 그리고 부활의 몸으로 베다니에서 승천하심으로써 영생의 구원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24:50-53). 그리고 사도와 제자들에게도 장차 부활과 영생이 있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사 누가의 기록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은 인생을 바쳐서 스승님의 뒤를 이어서 복음사역을 하고 대속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역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것입니다(22:28-30, 24:44-49, 1:8).

위의 세가지 방법 가운데 성도들이 소망하며 믿고 있는 것은 세번째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지도자들 가운데 사두개인들은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전파하고 있는 영생구원과 부활의 예언을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두개인들이 당시 산헤드린 공회에서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20:27). 그들은 만약 부활의 사건이 발생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우습게 것인가를 예수님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사두개인들의 예화와 질문 그리고 예수님의 답변 등이 본문에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20:28-33).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영생이 아니라 대물림을 통하여 육신적인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종교인들입니다. 그것은 현세주의에 안주하고 있는 유대교의 세속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딱하게 여기시고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부활과 영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20:34-36).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사두개인과 예수님과의 부활의 논쟁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20:27-28);

(1)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산헤드린 공회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정경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첫째,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배우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정경 39권을 전부 공부하고 있습니다. 둘째, 모세오경에는 부활의 이야기가 없으므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20:27). 그에 비해서 선지서와 성문서에 부활의 내용이 있으므로 바리새인들은 종말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11:24, 23:8). 셋째,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을 지지하면서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교권보다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3:1, 10).

(2)   고대 족장사회에서는 가문의 혈통과 재산을 지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며느리가 아들이 없이 과부가 되는 경우 재산을 떼주어서 따로 살길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동생과 합방을 시켜서 아들을 얻어 죽은 남편의 대를 잇게 만듭니다. 그리하면 죽은 아들의 혈통도 이어주고 재산이 다른 집안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예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것이 소위 수혼제’(嫂婚制, 형수와 결혼하는 제도)입니다(20:28).

(3)   참고로, 제도를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모세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행할 것이요, 여인이 낳은 아들이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것이니라”(25:5-6).

둘째로,그런데 7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7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7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20:29-33); 사두개인들의 예화가 참으로 기상천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7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결혼하여 아들이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과부가 형수는 아들이 없으므로 상속재산을 등기할 수가 없어서 앞으로 먹고 방도가 없습니다. 고대 족장사회에서는 남자만이 재산의 소유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혼제 따라서 시동생과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와 차례대로 결혼한 6명의 시동생들이 모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과부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부활을 하게 된다면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일까요? 사두개인들은 예화를 들고서 예수님의 견해를 알고자 합니다.

셋째로,예수께서 이르시되,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세상과 죽은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20:34-36);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부활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지를 간파하십니다. 그들은 부활을 통하여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친절하게도 부활과 영생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십니다;

(1)   부활은 옛날의 관계를 되살리는 소급적인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육신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영적인 관계의 형성에 있는 것이지 옛날의 육신적인 관계를 되살리는 것이 아닙니다(20:35). 비근한 예로서, 동서독의 통일의 경우를 수가 있습니다. 45년이 지나서 동서독이 통일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서간에 헤어진 부부와 가족관계가 복잡해집니다. 부부가 동서로 쪼개어져서 서로 가정을 이루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이 되었다고 하여 옛날의 부부관계를 되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관계가 너무나 복잡해지고 현재의 부부관계가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현상태로 동결하는 것입니다. 가족법상 소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영으로 부활하는 경우 옛날의 육신적인 관계로 회귀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고 하겠습니다.

(2)   마치 천사처럼 영체(靈體) 성격을 지니고 있는 부활의 몸을 입고서 되살아나는 경우에는 육신에게 숙명적으로 뒤따르고 있는 죽음의 운명이 사라지고 없습니다(20:36a). 예를 들면, 베다니 나사로의 경우에는 무덤에서 4일만에 되살아나옵니다(11:39, 44). 그렇지만 그것은 부활의 몸이 아니라 육신적인 몸을 입고서 되살아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죽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경우는 그것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부활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승천하여 영생의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활의 자녀는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20:36b).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육신의 몸을 벗고 영적인 몸을 입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부활하게 되면 영적인 몸을 입고서 영생을 누리게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적인 몸을 입고 있을 때에 지니고 있던 죽음의 운명이나 육신적인 가족관계를 전부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부활의 몸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이 허무맹랑한 이론을 전개하다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그만 무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부활을 얻어서 영생구원의 나라 하나님나라로 들어가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