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92강(눅20:20-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30. 17:37

누가복음 강해 192(20:20-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1 12()

 

 

유대교지도자들이 정탐꾼을 보내어 예수님을 시험하다; “가이사(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20:20-2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치시는 것을 유대교지도자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20:1-2). 그리고 가능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리고자 합니다(20:19). 그렇다면 유대교지도자들은 어째서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행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죽여버리고자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말씀의 뜻과 예수님이 전파하고 있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교지도자들과 선민들이 원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간략하게 설명을 해봅니다;

(1)   첫째, 유대교지도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선민들에게 행복을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 모세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아니냐?”(10:1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지키면 신명기 6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현세적인 복을 가나안 땅에서 크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6:3).

(2)   둘째,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노력을 하였지만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이스라엘 10 지파의 족보가 사라지고 맙니다(왕하17:6, 23-33). 그리고 주전 586년에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마저 신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망하고(왕하25:2-7) 선민 유대인들은 지금도 로마제국의 속국의 백성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3:1, 18:31). 비록 유대교의 자치권을 인정받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자치정부를 가지지 못하고 남쪽에는 로마의 군정이, 북쪽에는 로마의 비호를 받고 있는 헤롯의 분봉왕들이 선민인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은 선민들의 행복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3)   셋째, 그러한 현실에 대한 이해와 설명에 있어서 유대교지도자들의 견해와 예수님의 견해가 다릅니다;

1)      유대교지도자들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백성이 유대교인들인데 그와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은 잘못된 역사의 전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반드시 메시아를 보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옛날의 다윗대왕처럼 주변의 이방인들을 무찌르시고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할 것입니다. 그러면 시온의 영광이 다시 빛나게 것이며 선민들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의 설명은 다르십니다.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이기적인 선민사상으로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현세적인 복락을 넘치게 얻어서 세상에서 자신들만 마음껏 누리는 지극히 이기적인 세속주의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유대인들은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말씀의 본뜻을 깨달아 그것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하나님말씀의 본뜻이 바로 예수님의 천국복음입니다.

3)      예수님의 복음은 구체적으로, 선민들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고,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나라가 되며, 하나님신앙의 본을 보여주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12:1-5, 18:23-32, 19:5-6, 1:1-2, 3:16-17, 28:18-20). 그리하여 선민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구원을 받아서 함께 하나님나라의 행복을 맛보아야만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복음의 핵심사상인 만민구원사상, 영생구원사상,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지금까지 3 동안 예수님께서 주로 북쪽의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성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비교적 신경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매일같이 오셔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이라고 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치유사역까지 하십니다(19:47, 20:1).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예수님 주위로 자꾸만 몰려들고 있습니다(19:48).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20:19). 그들은 유대교인들에게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해주고는 있지만 크게 소용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생각으로는 당장 각종 질병을 고치시고 장애자를 치유하시며 귀신을 쫓아내어 주시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지도자들은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놀라운 선지자이지만 근본적으로 로마의 세력을 몰아내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들 사이에 자신들의 정탐꾼과 프락치를 심고 있습니다. 프락치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걸어서 넘어뜨리려고 하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의를 아시고 어떻게 현명하게 처신을 하시는지를 본문에서 의사 누가가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20:20-26).

그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이에 그들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20:20); 다음과 같이 대목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이에 그들 엿보다가”(20:20a); 여기서의 그들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구절인 19절에서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서 분노하고 있습니다(20:19a).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20:19b). 단숨에 예수님을 체포하여 처형을 해버릴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를 따르고 있는 백성들에게 어떠한 반론의 여지도 제공하지 아니하고 정당하게 예수를 처리할 있는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을 주시하면서 그러한 명분을 찾고자 계속 틈을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20:20a).

(2)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20:20b); 그러던 차에 좋은 방안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전혀 없는 방법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서 로마총독으로 하여금 처형을 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20:20b). 어떻게 하면 될까요?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 anti-)로마적인 사상과 동족들에 대한 선동을 증거해줄 있는 증인, 내부고발자를 유대교지도자들이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3)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20:20c); 유대교지도자들이 정탐꾼들을 교묘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는 무리들 속에 침투시키고 있습니다. 그들 정탐꾼들은 겉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무척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상당히 율법적이고 바리새적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의인인 하면서 예수님의 말꼬리를 잡으려고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0:20c). 그러므로 여기서 정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단순한 정탐꾼들이 아니고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넘어지게 하며 올무를 씌우려고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들은 프락치’(러시아의 fraktsiya에서 말이며 영어로는 파벌에 해당하는 fraction. 뜻은 적의 내부분열을 공작하기 위하여 적진에 심어 놓은 첩자나 끄나풀을 말하고 있음) 해당하는 자들입니다.

둘째로,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20:21-22); 다음과 같이 분설(分說, 나누어서 설명함) 봅니다;

(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rightly)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20:21a); 유대교지도자 가운데 특히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수하에 있는 바리새인 랍비나 생도들을 염탐꾼이나 프락치로 파견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하여 전제로 깔고 있는 말이 실로 교묘합니다; “그들이 알기로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실 때에 올바른 말씀을 바로(rightly)전하시지 윤색을 하거나 각색을 하여 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20:21a). 말은 겉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올바른 가르침을 베푸시는 스승이라는 칭찬의 말로 들립니다. 하지만 내심은 다릅니다. 이제 자신들이 한가지 질문을 터인데 사실대로 정직하게 답변을 달라고 하는 사탕발림입니다. 비록 예수님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구불리지 말고 그대로 직선적으로 답변을 해달라고 하는 함정인 것입니다.

(2)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truly)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0:21b); 한번 예수님께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바리새인들이며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파견이 첩자라는 사실을 간파하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그대로(truly) 대답을 해달라고 하는 요구입니다”(20:21b). 실로 무서운 음모입니다. 그러한 전제를 달고서 질문을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꼼짝 없이 그들이 바라고 있는 답변을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히스기야 때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하룻밤에 앗수르 대군 18 5천명을 몰살시켜버린 사실이 있습니다(왕하19:3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자는 외세인 로마제국을 물리치고서 도탄에 빠진 예루살렘과 선민들을 구원해야만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메시아로 말미암아 발생하여야 한다는 답변을 이끌어내고자 바리새인들이 미리 덫을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3)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20:22); 드디어 실제적인 질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로마를 물리치기 위하여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행위를 당장 중지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메시아라고 불리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선민들의 독립을 위하여 당연히 그러한 반로마 운동부터 전개해야만 한다고 보는데 어떠한 답변을 주시겠습니까?”(20:22 의역).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교묘한 질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응답을 하게 되면, 유대인들에게 ()로마적인 선동을 하면서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하고 있다고 총독부에 고발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반대로 답변을 하게 되면 그때에는 로마의 앞잡이이며 죄인이라고 몰아 부칠 것입니다. 참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참으로 어려운 처지를 말함) 형편입니다.

셋째로,예수께서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이니이다”(20:23-24);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놀랍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지혜를 진작에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혜가 번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프락치들의 음모와 술수를 단숨에 뛰어넘고 있습니다(20:23). 먼저 로마의 은전(銀錢, 은으로 만든 ) 데나리온을 하나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20:24a). 그리고 은전에 어떠한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어떠한 글귀가 적혀져 있는지 읽어보라고 하십니다(20:24b). 예수님의 요청에 대하여 반대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프락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데나리온 은전을 살펴보고서 보이는 그대로 답변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이사의 (로마황제의 모습과 로마의 글이 새겨져 있는) 이니이다”(20:24c).

넷째로,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20:25-26);

(1)   바리새인들로 보이는 첩자의 질문은 교묘한 것이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취지는 유대인이든지 로마인이든지 구별이 없이 모두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서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영적인 제자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모두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나라에서 함께 영생을 누릴 있기를 여호와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2)   그러므로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을 지배해서도 안되고 선민인 유대인들이 이방나라를 지배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서로 제국이 되고 패권국이 되겠다고 한다면 땅의 역사는 약육강식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러한 세상적인 논리를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예수님의 답변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20:25).

(3)   세상적인 논리로 하나님의 뜻을 재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회복한다고 하여 임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근한 예로,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제국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대왕이 통치 후반기에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고 이방신과 우상문화에 빠져버렸습니다(왕상11:1-13). 따라서 아들 때에 이스라엘 제국이 둘로 쪼개어지는 비극의 역사를 맞이했을 따름입니다(왕상12:16-20).

(4)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선민과 이방인의 차별을 철폐하고 만민의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과 땅에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것입니다. 그와 같은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님의 답변의 말씀 가운데서 번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심어 놓은 정탐꾼들이 감히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20:26a).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에 놀라서 입을 다물고 침묵할 따름입니다(20:26b).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적인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자면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복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합니다. 특히 세상적인 시험과 도전을 이기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풀이하여 체계화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이고 깊이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실천할 때에 다음과 같은 유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세상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세상적인 지혜와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어리석음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셋째, 이기적인 선민사상이나 현세적인 축복만을 탐하는 우상문화를 청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세상적인 지혜와 논리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