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85강(눅19:28-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27. 14:19

누가복음 강해 185(19:28-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1 5()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인 예루살렘 입성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는가?(19:28-35)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의사 누가는 역사적인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의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여리고의 회관장 삭개오의 집에서 하신 므나의 비유 수록하고 있습니다. 의미는 므나의 비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 서로 관련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것일까요? ‘므나의 비유 다시 살펴보면 시작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나라로 때에 10 불러 은화 10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사람이 우리의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19:12-14).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째, 종들의 주인인 귀인이 나라로 떠날 예정입니다. 여행의 목적은 왕위를 받아서 돌아오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사명을 마치시면 멀리 떠났다가 왕위를 받아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미리 비유 가운데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둘째, 주인이 떠나기 전에 10명의 종들을 불러서 므나 하나씩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열심히 장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예수님이시라면 10명의 종들은 12사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3년이 넘는 공생애를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가르치고 치유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사도들과 제자들은 복음사역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왕위를 받아서 세상에 다시 오시게 되면 결산을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3)   셋째, 그런데 백성들이 귀인이 왕위를 받아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귀인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인이 예수님이시라면 백성들은 선민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 예수가 그들이 바라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원하고 있는 것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여 시온의 영광을 세상에 떨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할 생각이 전혀 없는 선지자입니다. 대신에 이방인들을 용서하고 선민들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종으로서 살아가야 된다고 설파하고 있으니 사상이 마음에 들지를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돌아올 없도록 조치를 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서 처단해버리는 방법입니다.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벌써 여리고에서 므나의 비유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선민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만민구원을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염두에 두시고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 베다니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둘을 보내시며”(19:28-29);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설명을 해봅니다;

(1)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19:28);

1)      예수님께서는 여리고 성내에 있는 세관장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면서 므나의 비유 말씀하셨습니다(19:5-7, 11-27). 그것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입니다(19:28a). 그리고 나서 본문에서 의사 누가는 예수님 일행이 곧바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걸어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19:28b).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발생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19:29-38). 그와 같은 의사 누가의 기록은 훗날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이야기 등을 모두 생략하고 있는 것입니다(7-11).

2)      어째서 의사 누가는 여리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므나의 비유 이어서 예루살렘 성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곧바로 연결시키기를 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떠나시고 다시 오실 때에는 왕으로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때에는 제자들이 실천한 복음사역의 내용에 대하여 결산을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반대한 백성들을 심판하십니다. 셋째, 사실을 명심하고서 제자들과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3)      이미 설명을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므나의 비유 통하여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인 종들과 헤어지고 나면 훗날 왕위를 받아서 다시 그들에게 오실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비유로 하십니다. 그때에는 종들의 충성의 정도에 따라서 커다란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왕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제자들은 열심히 전심전력으로 능력을 발휘하여 복음사역에 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19:12-19).

4)      그리고나서 예수님 일행은 여리고에서 서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19:28b). 그런데 예수님은 발걸음이 빠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보다 먼저 앞장 서서 걸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30km 거리입니다. 그런데 길이 마치 등산을 하는 것과 같이 힘이 듭니다. 이유는 여리고가 해저 260m정도의 골짜기인데 비하여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이상의 산지이기 때문입니다.

(2)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 베다니 가까이 가셨을 때에”(19:29a);

1)      예루살렘 동쪽에는 감람원이라고 하는 동산이 있습니다. 동산에는 올리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은 산의 이름이 감람원입니다. 보통 지중해연안에서는 온난한 기후 덕택에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 사막성 기후를 가지고 있는 예루살렘과 남방에서는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자리고 있습니다.

2)      그래서 그런지 감람원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비탈에는 무화과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마을이 있습니다. 정상에서 1km비탈에 있는 마을이 벳바게이며 2km아래에 있는 마을이 베다니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을의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익는 속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벳바게 마을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빨리 익습니다. 높은 산지에서 자라고 있는 벳바게 마을의 무화과나무가 뜨거운 햇볕에 열매가 빨리 익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의 이름이 인상적입니다; 벳바게는 익은 무화과나무의 이고 베다니는 익은 무화과나무의 이기 때문입니다.

(3)   제자 둘을 보내시며”(19:29b);

1)      예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실 때에 사람만을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최소한 2명으로 짝을 만들어서 파송하십니다(19:29b). 일찍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70명의 제자를 훈련시켜서 여러 마을에 파송하실 때에도 21조로 만들어 보내십니다(10:1). 이유가 무엇일까요?

2)      그것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복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과 무관하지가 않습니다(1:26-28). 사람에게는 반드시 반려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2:18-25). 당시의 가부장사회의 질서 때문에 남자와 여자를 함께 팀으로 파송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남자 제자 2명을 팀으로 파송하는 것이 좀더 완전한 사역을 기대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역자의 중요성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19:30-31);

(1)   예수님께서는 감람원 정상에서 서쪽과 동쪽을 살펴보십니다. 별로 높지 아니한 감람산 봉우리이므로 서쪽에 있는 예루살렘 성은 굉장히 높아 보입니다. 반면에 동쪽에는 비탈길을 타고서 내려가는 중턱에 벳바게 마을이 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평지에 베다니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을 올려다 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맞은 동쪽에 있는 벳바게 마을로 제자를 보내십니다(19:30a).

(2)     사람의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19:30b). 사람이 아직 잔등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라고 한다면 정말 어린 나귀입니다. 그러한 어린 나귀들은 아직 인지능력이 발달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번 잃어버리게 되면 주인집으로 찾아올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집의 마당에 매어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벳바게 마을로 내려가서 동네에 그러한 어린 나귀가 매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두말 없이 그냥 풀어서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19:30b). 그것은 비상식적인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는 가축을 도적질하는 경우 갑절로 배상하도록 벌써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2:4).

(3)   그래서 다음 구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의 어린 나귀를 도적질해서 오라고 지시하실 리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19:31) 라고 상세하게 일러주십니다. 여기서 만일이라고 언급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축은 본래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것이므로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사용하실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1:21, 17:10).

2)      하지만 선민 유대인들 가운데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남의 어린 나귀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가를 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잠시 빌려서 사용하실 것이라고 답변을 해주라는 것입니다(19:31). 그것은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지키고자 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해주고 있습니다(3:31).

셋째로,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때에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19:32-34);

(1)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비탈에 있는 마을 벳바게에 들어가보니 마침 어느 마당에 매어져 있는 나귀새끼가 마리 보입니다(19:32). 그래서 고삐를 풀려고 합니다(19:33a). 그때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어째서 남의 나귀의 고삐를 풀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19:33b).

(2)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 주께서 쓰시겠다(19:34)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나귀의 주인들이 아무런 이의가 없이 자신들의 나귀를 사용하라고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 나귀이며 여호와 이레 축복입니다(22:13-14, 9:9).

넷째로,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19:35);

(1)   나귀새끼를 타고서 입성을 하고 있는 세상의 임금은 없습니다. 왕이란 높은 말을 타고서 또는 전차를 타고서 입성을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여러 사람이 둘러매고 있는 연을 타고서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아니하도록 어린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통치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노예해방과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 평화의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2)   그렇지만 나귀새끼는 한번도 사람을 잔등에 태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장도 없습니다. 그러한 나귀를 안장도 없이 타셔야만 하시는 스승 예수님이 안스럽습니다. 따라서 지근거리에 있던 사도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안장을 대신하도록 나귀의 잔등에 걸치고 있습니다(19:35a). 위에 예수님을 모시고 자신들이 나귀의 고삐를 잡고 있습니다(19:35b). 이제는 바야흐로 그러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입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러 들어갈 때에 위협적인 모습으로 입성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어린 나귀를 타고서 평화와 구원을 전하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어린 나귀의 등에 사도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안장으로 깔아 드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복음사역의 현장으로 들어갈 때에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안장을 삼듯이 그렇게 공손하게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들어가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주군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겸손하게 종으로서 어린 나귀의 고삐를 잡고서 복음사역의 현장에 들어서게 된다면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에서 선포가 되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그러한 겸손한 제자들을 통하여 되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성도님들의 복음사역이 충만하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