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86강(눅19:36-4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28. 01:43

누가복음 강해 186(19:36-4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1 6(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입성의 의미와 바리새인들의 불편한 심기에 대하여(19:36-40)

의사 누가는 본문에서 세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고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태도(19:36-37) 둘째, 찬양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2:14, 19:38) 셋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바라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불편한 심기(19:39-40) 등입니다.

그러한 가지 사실이 어떻게 기록이 되고 있는지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무리가 자기들이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19:36-37);

(1)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안장으로 사용하도록 펴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19:35). 그리고 본문에서는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19:36). 그들은 각각 어떤 사람들로 추정할 수가 있을까요?

1)      첫째, 가장 먼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의 잔등 위에 걸쳐 놓은 자들이 있습니다(19:35).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으로 벳바게 마을로 가서 어린 나귀를 끌고 2사람의 사도들로 보입니다(19:29-35). 나귀새끼를 빌리기는 하였는데 막상 잔등을 보니 안장이 없습니다.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으므로 안장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19:30). 안장이 없는 짐승을 타게 되면 엉덩이가 아파서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따라서 스승이신 예수님을 편하게 모시기 위하여 사도는 정성을 다하여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잔등에 안장처럼 걸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9:35).

2)      둘째, 사도가 어린 나귀를 끌고서 돌아오기를 감람 봉우리에서 예수님과 기타 10사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귀의 잔등에는 사도가 펼쳐 놓은 겉옷 안장 있습니다. 덕택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편하게 타시고 있습니다(19:35).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10사도들이 자신들도 무언가 예수님을 위하여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나귀를 끌고 사도가 예수님께 정성을 바친 것입니다. 나머지 10사도들도 그들에게 수가 없습니다(10:41). 그래서 정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방법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아예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깔아드리는 것입니다(19:36). 그것은 스타를 위한 레드 카펫 아니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한 겉옷 카펫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사도들의 친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게 되면 당장 외세를 몰아내고 선민의 제국을 세우시는 것으로 잔뜩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다가올 논공행상을 염두에 두고서 사도들이 충성경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수도 있는 것입니다(10:35-41).

(2)   그리고 제자의 무리들은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19:37). 그런데 12사도들과 제자의 무리들 사이에는 시간적 공간적 간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제자들은 구분이 되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어떠한 구분이 가능할까요?

1)      예수님께서는 12사도와 함께 어린 나귀를 타시고 감람 봉우리에서 서쪽 비탈로 내려가십니다. 골짜기를 타고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다소 완만한 오르막 길을 계속 올라가면 예루살렘 성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골짜기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벌써 많은 무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      그들은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경험하거나 바라보고서 아예 제자로 따라 나선 무리들입니다(18:43, 19:37a).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호위하면서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19:37b).

둘째로,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에는 영광이로다 하니”(19:38); 구절은 의사 누가가 벌써 기록하고 있는 2장의 내용과 비교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장의 대목은 베들레헴 외곽의 들판에서 밤새 양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메시아 탄생에 관한 천군천사들의 찬양의 내용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상호비교를 해보게 되면 과연 어떠한 의미가 드러나게 될까요?

(1)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19:38a);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대목이 선포가 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훗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언제의 이야기일까요?

1)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므나의 비유 참조하면(19:11-2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나시고 왕으로 유대 땅에 다시 오시는 그때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나라로 때에”(19:12),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19:15).

2)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왕위를 받기 위해서는 전에 반드시 하셔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천국복음을 전하고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와 대속의 삶을 살아간 결과 무덤 속에서 부활하는 미래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어야 합니다(18:31-34).

3)      그리하면 사도와 제자들이 스승의 뒤를 이어서 세상에 천국복음을 전하고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주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같은 제사장들이 되는 것입니다(22:28-30, 벧전2:9).

(2)   하늘에는 평화”(19:38b); 누가복음 2장의 내용과 반대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 2장에서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의 평화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의미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메시아로서 성육신을 하신다고 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태어나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점을 세례 요한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사람들이 이상 죄를 짓지 아니하고 유월절 어린양의 속죄로 아버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도록 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탄생은 땅의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2)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끝내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 되면 어떻게 되시는 것일까요? 십자가의 속죄의 제사는 어떤 효과를 가지고 올까요? 그것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대속의 제사가 것입니다. 평화와 화목이 하늘에서부터 먼저 이루어집니다(19:38b, 5:10). 따라서 장차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인 칭의의 은혜가 임하게 것입니다(3:25).

(3)   가장 높은 에는 영광이로다 하니”(19:38c);

1)      2장에 기록된 말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에서 있는 사실은 첫째,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이 땅에서는 평화이며 둘째, 하나님께서 계시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본문에서 있듯이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 되면 반대의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첫째, 하늘에는 평화”(19:38b) 둘째, (땅에서는) 가장 높은 에는 영광이로다 하니”(19:38c)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반대의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3)      예수님의 속죄의 제사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대속의 은혜를 알고서 회개를 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의 은혜를 받고서 의인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며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비결이 됩니다. 점은 이미 로마서의 내용을 참조하여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4)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성육신을 때에 하늘의 영광을 두고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하여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2:14)라고 찬송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 제사를 지내시고 돌아가신 후에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게 되면 달라지십니다.

5)      예수님께서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되찾으시기 때문입니다. ,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높은 곳에 강림하시는 것과 같습니다(19:16-19). 따라서 “( 땅에서) 가장 높은 에는 영광이로다 하니”(19:38c)라고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로,무리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19:39-40);

(1)   예수님을 어린 나귀에 태우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서고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찬양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광경을 보려고 몰려들고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가세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이 떠나갈 듯합니다. 그러므로 평소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습니다.

(2)   갈릴리의 선지자 나사렛 예수는 그들 바리새인들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절대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는 외세를 물리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군중심리에 휩싸여서 환호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일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접근하여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군중을 선동하고 있는 제자들을 조용히 하도록 책망해달라는 것입니다(9:39).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정반대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19:40);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모두 깨닫고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      하지만 세상 죄를 지고가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오심을 환영하는 것은 심히 마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피조물들도 환호를 해야만 하는 가장 경사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마치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나면 엄청난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 그리고 선민 유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는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선민의 제국이 건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이 함께 구원을 받아 함께 영생을 누릴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하나님나라를 건설할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영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4:16),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예수를 죽은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그와 같은 엄청난 변화를 이미 초대교회의 참여 선교여행에의 동참으로 체득하고 있는 의사 누가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본문에서와 같이 실로 감개가 무량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음미하시고 의사 누가와 동일한 감격을 느낄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