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81강(눅19:7-1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24. 03:20

누가복음 강해 181(19:7-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1 1()

 

삭개오의 집에서 발생한 일과 연계가 되고 있는 가지의 비유 가지의 사건에 대하여(19:7-10)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잔치를 하면서 자리에서 선포하고 있는 회개의 내용이 실로 모범적인 회개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면 정도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 누가가 싣고 있는 내용은 이미 15장과 18장에서 설명을 있는 가지의 비유 가지의 사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가지를 본문과 연계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와의 비유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18:13-14, 19:7).

(2)   둘째,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부자관리에게 하신 말씀과 본문에서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맹세하고 있는 이야기가 서로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18:22, 19:8).

(3)   셋째, 예수님께서 믿음과 구원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18장에서 바디매오에게 해주신 말씀을 본문은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18:42, 19:9).

(4)   넷째,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되짚어보게 됩니다(15:24, 19:10).

그와 같은 사실에 유의하면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려 들어갔도다 하더라”(19:7);

(1)   여리고 성은 북쪽이나 동쪽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자 때에 거쳐가게 되어 있는 일종의 관문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뿐만 아니라 정보와 물자가 모이고 있는 집하장과 같습니다. 이에 따라 여리고 성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국내외 정세에 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여리고 성의 주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사람이”(19:7a) 세관장인 삭개오의 집을 일부러 방문하시고 계시는 선지자 예수님의 행적을 이상한듯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디씩 하고 있습니다;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려 들어갔도다 하더라”(19:7b).

(2)   여리고 성의 주민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이 얼마나 민족주의와 선민사상에 투철한 백성들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수입하는 물품에 대하여 비싼 관세를 매기고 돈을 모조리 거두어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세관원들에 대하여 매우 감정이 좋지 않으며 그들을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그러하신 것처럼(5:29-30) 여리고에서도 세관원의 집에 식사를 함께하려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19:6-7). 이번에는 일반 세관원의 집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되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의 집입니다. 그리고 변방 갈릴리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는 수도 예루살렘에 가까운 여리고입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시고 민족감정도 돌보지 아니하시는 이상한 선지자 나사렛 예수님의 행보라고 하겠습니다.

(4)   하지만 여리고의 주민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입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들의 여호와께서 어떠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1)      기본적으로,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므로 세상의 만민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을 동원하여 이방인들과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19:5-6).

2)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을 하고 있는 잃어버린 자와 또한 죽은 자로 여기고 있는 이방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그리고 창조주의 공의의 사랑의 정신을 전해주고자 하십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는 선민들이 가장 먼저 동참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짐작하지도 못하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저 자신들만 여호와의 말씀을 독점하고 율법생활을 하여 구원을 받으면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4)      그리고 자신들만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은 전부 멸망의 대상이라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선민들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시온의 영광을 세상에 떨쳐야만 합니다”.

5)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아사상과 삐뚤어진 선민사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18장에서 비유로써 정확하게 가르쳐 주신 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와의 비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알고서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세리가 정직한 믿음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한편, 세리가 죄인이며 자신은 의인이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긍정적인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18:9-14).

둘째로,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

(1)   예수님께서는 18장의 부자관리와의 대화에서 영생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너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8:22). 말씀을 들은 부자관리는 얼마나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19장에서는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절반을 자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9:8a).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구원이 집에 이르렀다”(19:9a) 하는 놀라운 선포를 얻고 있습니다.

(2)   어째서 삭개오가 재산이 아니라 절반을 내어놓겠다고 하는 데에도 구원이 임했다고 예수님께서 선언을 하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부자관리와의 경우와는 형평이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의 삭개오의 말을 들어보게 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

1)      진리의 깨달음과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깨달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자율적으로 서원하여 실천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 삭개오가 그와 같이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관리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강경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2)      만약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게 될까요?   당사자는 하늘의 보화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다님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의 가족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으며 생존의 기로에 서게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족에게도 재산을 먼저 나누어 주어야만 합니다.

3)      가난한 자와 만민구원에는 그러한 개념이 포함이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아니하게 되면 그것은 극단주의자가 되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거의 재산을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고 극히 일부만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약은 수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가족을 돌본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평균치나 생계 유지의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높은 수준의 생활을 계속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그와 같은 입장에서 경제에 밝은 삭개오가 보완적인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아무 조건도 없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하겠다고 합니다(19:8a). 그리고 추가로 자신에게 부당하게 재물을 빼앗긴 사례가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19:8b).

5)      그것은 일반적으로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2 배상의 법칙(22:7) 훨씬 상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충분하고도 넘치는 선의의 보상이나 배상의 실천을 여러 사람 앞에서 특히 예수님의 앞에서 약속하고 있는 삭개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임했음을 선포해주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9:9a).

셋째로,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 집에 이르렀으니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

(1)   삭개오가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이제는 새로운 마음으로 회개하는 심정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소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서원을 담고 있는 맹세입니다; “전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완적으로 자신이 남에게 갈취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고 맹세하고 있습니다”(19:8).

(2)   삭개오의 서원과 맹세는 예수님 앞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야곱이 벧엘에서 여호와 앞에서 행한 서원의 맹세와 같은 것입니다(28:17-22). 따라서 그것을 실천하게 되면 엄청난 축복이 집에 임하게 됩니다(19:9).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자 집안이 이스라엘 족속이 되며 대대로 선민의 복을 얻게 것과 같습니다(35:9-15).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 집에 이르렀으니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

1)      삭개오의 회개와 서원의 맹세로 말미암아 영생의 구원이 당사자에게만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의 구성원 모두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19:9a).

2)      그것은 당대에만 머물고 있는 축복의 말씀이 아닙니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자손대대로 복이 흘러가게 것입니다(13:15-16, 19:9b).

넷째로,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1)   먼저 15장에 적혀 있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가운데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

1)      둘째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장차 자신이 상속할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하여 재산을 들고서 이웃나라에 가서 탕진을 하고만 자입니다. 그래서 탕자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탕자가 굶어 죽지 아니하려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들로 불릴 염치도 없기에 그저 품꾼의 하나로 사용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2)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있는 차남에 대하여 아버지는 아들의 신원을 회복해주고 환영의 잔치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자리에서 이웃에게 선포하고 있는 아버지의 말씀이 위와 같습니다. 비유의 말씀 속에 예수님께서는 선민과 이방인들을 회개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그대로 담고 계십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표현이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고, 하나는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둘째 아들인데 어째서 가지의 표현을 사용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수사학적인 강조의 용법에 불과한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떠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1)      여기 본문 삭개오의 경우에는 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버린 영혼과 비교하면 나름대로 괜찮은 것입니다. 단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집에 데리고 오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5:6).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이 임의적으로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는 세리 삭개오와 같은 자들은 그저 회개만 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구원을 얻을 있는 잃어버린 양들에 불과합니다.

2)      그에 비해서 참으로 영적인 상태가 완전히 죽어버린 자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삭개오와 같은 자발적인 회개가 어려운 자들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가진 것의 절반을 내어놓고 갈취한 것에 대해서는 4배의 배상을 하겠다고 하는 서원이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는 마치 탕자의 비유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맏아들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 사전에 살림을 나누어서 자신의 몫을 누리고 살고 있으면서도(15:12) 스스로 아버지를 모시고 자신이 봉양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자입니다(15:29).

3)      그렇게 주객이 전도가 되어 있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자가 바로 신앙 양심이 죽어버린 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자신이 부릴 있는 종과 같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자들이 소위 영적으로 죽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떠한 절차가 필요할까요? 단계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제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깃발입니다(11:10). 둘째, 역사적인 심판과 남은 자들의 회개가 필요합니다(6:10-13, 11:12, 16, 1:28).

결론적으로, 잃어버린 자와 죽은 자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길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다시 찾고자 하는 삭개오처럼 잃어버린 자로서 빨리 회개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삭개오가 어떠한 서원을 하고 있는지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자신의 종처럼 부리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죽은 자가 되고 맙니다. 또한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보다 귀하게 생각하게 되면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생명도 사회적으로 하나의 재물로 취급하고 맙니다. 그렇게 영혼이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로 살아가게 되면 역사적인 심판을 인생 가운데 당하게 됩니다(11:26, 31-32, 12:4, 7:4, 60년을 하란 땅에서 살게 되는 족장 데라에 대하여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로 치부하고 있음). 그때가서야 회개를 하게 되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빨리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고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창조주의 능력이 함께할 것입니다. 은혜가 땅에 충만하기를 간구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