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79강(눅18:35-4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22. 02:32

누가복음 강해 179(18:35-4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30(주일)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인생을 살게 되는 비결에 대하여(18:35-43)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이 작성한 글이 훗날 수십억의 성도들에게 읽히게 되는 소위 베스트셀러인 성경의 내용이 것으로 예상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일단 자신의 저작이 성경 66권에 편성이 된다고 하는 것도 저술 당시에는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확정된 시기가 아주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구약이 39권으로 확정이 것이 주후 90 얌니야 회의이고 신약은 주후 397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으로 확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절(章節, chapter and verse) 편성은 나중의 일입니다; 첫째, 장의 구분은 신약에서 먼저 이루어졌는데 시작은 주후 4세기의 바티칸 사본입니다. 구약의 경우에는 주후 13세기초 라틴어역(Valgata) 최초입니다. 둘째, 오늘날과 같은 절의 구분은 구약이 주후 10세기 아세르 역본이며 5,845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경우에는 주후 16세기에 스테파노의 표기인데 그것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있듯이 의사 누가는 자신의 글을 오늘날과 같은 장절로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세대의 사람들이 이슈별로 기술이 되어 있는 의사 누가의 복음서를 이해하기 쉽도록 오늘날과 같이 장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마지막으로 포함이 되어 있는 18장을 하나의 이슈로 다음과 같이 이해를 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주제어는 어린아이입니다(18:15-17).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순수성과 천진난만함, 그리고 끝없는 동경심과 부모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마음 등을 배워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라고 선민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18장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어린아이는 이해관계를 떠나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가 자신을 너무 성가시게 하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18:1-8).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냥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이기 때문에 과부를 도와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2)   둘째,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미성숙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 어른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생활에 모범을 보이고 있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도 성숙하며 의로운 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18:9-12).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통회하고 있는 세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13-14).

(3)   셋째, 부자관리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게 되면 영생을 받을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18:18-25). 재산은 완벽하게 자신의 소유물이며 그것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고 하는 물질적인 생각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모님만 계시면 굶어 죽지를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면 것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는 재물의 소유권보다는 부모님이 소중한 것입니다.

(4)   넷째,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과연 사실일까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서 자신의 인생과 소유를 바쳐서 만민을 구원하고 영생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공생애를 살아간다면 과연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틀림 없이 부활의 날이 있을 것임을 제자들에게 재차 예언해주고 있습니다(18:31-33).

(5)   다섯째,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눈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보이는 모든 세상이 신기하고 끝없는 동경심으로 새로운 미래를 살아가는 그러한 어린아이의 눈과 믿음을 어떻게 하면 어른들이 가질 수가 있을까요? 해법을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사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18:35-43).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자 그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놀라운 세상을 살게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자신과 같은 맹인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평생동안 전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8:35-38);

(1)   여리고는 요단 강변 계곡길을 따라서 남하를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들르게 되어 있는 성읍입니다. 또는 염해 북쪽 요단 하류 동편 이방지역에서 서쪽으로 유대 땅으로 건너와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때에 처음 만나게 되는 성읍입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수입물량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는 세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관장의 이름이 삭개오라고 19장에서 의사 누가가 말해주고 있습니다(19:1-2).

(2)   여기서는 유대 땅에서 요단 강변 계곡길을 따라서 남하를 하시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하여 여리고 성을 지나가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점점 여리고 성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18:35a). 바깥에는 농촌마을이 형성이 되어 있으며 가까이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밖에는 장사치들과 여행객들이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들 가난한 사람들과 장사치들이 지금 예수님의 주위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그토록 유명한 선지자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들의 병과 장애를 치유 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3)   여리고 성밖 입구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맹인 사람이 소동을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18:35b). 사람들의 소리가 크게 나고 있으므로 구걸을 하기에 좋은 기회입니다. 그래서 얼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인지 묻고 있습니다(18:36). 그들의 답변이 맹인 거지에게 의외의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8:37-38);

1)      맹인 거지는 이제 돈을 구걸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를 만날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서 돈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3:6). 전부터 갈릴리 지역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맹인 거지는 자신의 귀로 똑똑히 듣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선지자가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서 많은 병자와 장애자들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4:40). 비근하게는 예루살렘의 실로암 못가에서 나면서부터 맹인인 자가 예수님에 의하여 완전히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9:1-12).

2)      여리고 성의 맹인 거지에 대한 이야기는 공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기록의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마가복음에서는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10:46)라고 맹인 거지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아버지 디매오의 아들이라고만 불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미성년자로 보입니다. 둘째, 마태복음에서는 맹인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20:29)라고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꺼번에 고침을 받게 것입니다(20:34). 셋째, 그로 미루어 보아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여리고의 맹인 거지는 사람 중의 사람으로서 이름이 바디매오라는 젊은이로 보입니다.

3)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8:38). 그것은 언뜻 보면, ‘유대인의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듯이 자신을 돌아보시고 부디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원이라고 하는 것이 많은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 다윗대왕의 능력 바깥의 것입니다. 따라서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세상임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로,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18:39-40);

(1)   앞서가는 자들’(18:39a) 예수님 가까이 접근해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가까이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천국의 복음으로 들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있는 행운을 얻고 있는 자들입니다. 마치 유월절 구원으로 출애굽의 은혜를 누리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이 자들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주위에 하찮은 맹인 거지가 접근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를 꾸짖어 조용히 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18:39b). 그것은 마치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구원과 치유의 능력을 자신들만 독점하려고 하는 선민사상을 닮아 있습니다.

(2)   그러나 바디매오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체면을 차리거나 그들의 꾸지람을 듣고서 주춤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멈추시며 제자들에게 지시하십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18:40);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으며 천대를 받고 있는 맹인 거지의 부르짖는 소리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25:40).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둘러싸고서 () 장막 치고 있는 그들에게 휘둘리지를 않으십니다. 예수님 자신을 세상에 보내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루라고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서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습니다.

(3)   그래서 불쌍한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불러서 자신에게 데리고 오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가 때까지 자리에 멈추어서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8:40a). 그를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질문하시기를 시작하십니다(18:40b).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맹인 거지인 바디매오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훤히 아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그것은 가지의 목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주위의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십니다. 사회에서 소외가 맹인 거지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시고 대화를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본인 확인을 하고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믿음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18:41-42);

(1)   예수님께서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8:41a). 너무나 뻔한 질문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소경인 거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보기를 원한다고 답변을 것으로 보입니다(18:41b). 그러나 한번 깊이 생각을 해보자면 그것이 아닙니다;

1)      첫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자신의 눈을 있도록 고쳐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옛날 다윗왕조의 어떠한 왕도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준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가 비록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18:38)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왕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어 주신 구속자이며 구원주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 예수님께서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믿음을 알아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신뢰하고 있는지 그의 답변을 들어보고자 하십니다 과연 바디매오는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눈을 고쳐 주시고 새로운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있도록 조치해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답변을 듣고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걸맞는 은혜를 베풀어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답변이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18:41b).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기분 좋게 그가 구원을 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믿음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18:42);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비참한 맹인 거지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가지 여호와 하나님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훗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신의 눈도 고쳐 주시고 새로운 삶도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밖에는 바디매오의 인생에서 다른 선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절대적인 소망이며 하나의 믿음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미 구원을 받았음을 선포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18:42).

넷째로,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18:43);

(1)   바디매오는 맹인의 신세만 면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과 바디매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을 고쳐주신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18:43a). 그리고 바디매오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여리고를 떠나고 있습니다(18:43b). 모습을 바라보고서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18:43c).

(2)   여리고 맹인 거지에 대한 의사 누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의 복음서에 따르게 되면 후의 이야기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마가는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 청소년의 나이로 보입니다(14:50-52). 그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여리고 출신의 동무를 예루살렘교회에서 사귀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뒤늦게 예수님의 제자가 맹인 거지출신 바디매오로 보입니다. 그러한 인연으로 마가만이 그의 복음서에 자신 있게 여리고 성의 맹인 거지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10:46). 그와 같은 훗날의 역사를 짐작해보게 되면 참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후계자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시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민족적인 염원을 예수님께서 외면하시자 가차없이 가짜 메시아로 정죄를 하고서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소망은 선민들의 것과 다릅니다. 그는 그와 같은 세속적인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부르고 있는 다윗의 자손 예수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있는 왕이 아닙니다. 예수는 맹인인 자신에게 새로운 눈을 만들어주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해줄 있는 구속자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요컨대, 바디매오는 그러한 의미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선민 유대인들의 기대는 무너져버렸지만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소망과 믿음은 긍정적으로 응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믿음과 기도가 아니라 영적인 믿음과 완전한 치유의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은혜가 여러 성도님들에게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