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77강(눅18:24-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21. 10:15

누가복음 강해 177(18:24-3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28()

 

영생을 얻을 있는 인생관과 재물관에 대하여(18:24-30)

 

본문과 관련하여 등장하고 있는 부자관리는 겸손하며 정직한 청년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부자관리를 겸손한 자로 표현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자청년은 율법생활에 힘쓰고 있지만 영생의 확신이 자신의 마음속에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영생을 얻을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8:18).

그렇게 장래가 촉망이 되는 유대인 청년을 상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수용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얻을 있는 길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을 들은 부자청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반응에 대한 내용입니다. 과연 그들의 반응이 어떠하며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부자인 관리)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 하시니”(18:24-25);

(1)   부자인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심한 근심에 빠져 있습니다(18:23).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나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서야만 영생을 얻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8:18, 22).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부자이며 관리인 그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2)   그런데 부자인 관리가 깜빡 빠뜨리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8:22) 말씀하신 부문에서 하늘의 보화 언급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의 질문에 답변하시는 형식으로 구체적으로 가지를 언급하십니다; 첫째, 현세의 보상과 둘째, 내세의 영생이 모두 이에 해당이 된다고 밝히고 계십니다(18:28-30).

(3)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부자인 관리는 쉽게 결단을 내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모습을 바라보시고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부자인 관리)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 하시니”(18:24-25);

1)      덩치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러한 극단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늘귀라고 불리고 있는 작은 문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엔간히 성에는 문과 작은 문이 있습니다. 작은 문이 소위 바늘귀 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작은 문은 문이 닫히고 나면 비상시나 밤중에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통과합니다. 그렇지만 덩치가 낙타들은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어야 작은 문을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전에 등에서 짐을 전부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재물을 내려놓고 겸손한 자세를 가질 때에 바늘귀 문을 통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마찬가지로 자신을 낮추는 자는 덩치가 낙타만 하다고 하더라도 무사히 바늘귀 문을 빠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신앙의 자세를 낮출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라고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이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게 되면 삶의 방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3)      구체적으로 첫째, 자신의 목숨도 인생도 모두 주인의 것이기에 주인의 뜻을 따라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청지기인 자신에게 재물을 맡긴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주인께서 생존의 위기에 처한 자를 도와주고 생계가 어려운 자를 돌보아주라고 재산을 주신 것입니다(10:33-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그러므로 사회적인 약자이며 소외된 소자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내어준 대상으로 보고서 돌보아주면 됩니다(25:40, 달란트 비유).

둘째로,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있느니라”(18:26-27);

(1)   그렇지만 실제로 자신의 목숨과 재산에 대하여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고 하는 인식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로 회의적인 입장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18:26 의역).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명쾌하게 답변을 하십니다; “사람은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하실 있도록 믿음으로 맡겨드리는 것입니다”(18:27 의역).

(2)   실제로 그렇게 맡겨드린 역사가 있을까요? 당장 히브리정경을 살펴보더라도 쉽게 한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엘리사의 경우입니다;

1)      엘리사는 선지자 엘리야가 찾아와서 겉옷을 자신에게 던질 때에 생도로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왕상19:19b). 그는 밭을 갈고 있던 자신의 마리를 잡아서 동네잔치를 벌이고나서 기쁜 마음으로 선지자 엘리야를 따라서 가게 됩니다(왕상19:21).

2)      엘리사의 집은 굉장한 시골 부자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12겨리 24마리의 소가 함께 밭을 갈아야 정도로 넓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부모가 소유하고 있는 상속재산을 포기하고서 선지자 엘리야의 생도로 따라나선 것입니다(왕상19:19a).

3)      특히 당시는 아합 왕의 시대인지라 북조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암흑기이며 여호와 신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시대입니다(왕상16:30-33, 19:1-2).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엘리사가 흔쾌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여호와의 종으로 새인생을 출발하는 기적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현세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18:28-30);

(1)   베드로의 질문의 내용 그대로 사도들은 3년간 집을 떠나서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공생애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영생 뿐만 아니라 하늘의 보화까지 받을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사도 베드로는 앞으로 어떠한 보상을 받게 될지 그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2)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상세하게 답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 배운 그대로 장차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자신들의 공생애를 살아가게 되면 현세에서 희생한 그것의 여러 배의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의 구원을 확실히 받게 된다는 예수님의 확약의 말씀입니다.

(3)   그렇다면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있을까요? 히브리정경을 살펴보면, 욥의 일대기에서 다음과 같이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1)      욥은 고대 족장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는 동방 땅에서 부자이며 하나님의 선지자로 불린 사람입니다(1:1-3). 하지만 하루에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1:14-19). 더구나 몸에도 병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를 간호하던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고통을 잊어버리는 방법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을 정도로 참담한 지경입니다(2:9).

2)      그러나 욥은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기 전에 어째서 자신과 같은 의인이 그와 같은 참상을 당하고 있는지 이유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원하게 듣고서 인생을 마치고자 하는 것입니다”(7:20-21, 13:22-23, 19:23-27). 소원을 욥기 후반부에 하나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해주시고 아울러 지금도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설명하십니다(38:1-41:34).

3)      설명을 듣고서 욥이 회개를 합니다(42:1-6). 창조주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시는데 자신은 고작 가족의 복과 건강만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직분만을 행했기 때문입니다(1: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실천하지도 못했으며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구현하지도 못했습니다.

4)      따라서 회개한 욥은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고자 했던 괘씸한 친구의 허물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속죄의 번제를 드리고 기도를 드려줍니다(42:8-10). 순간 현세적으로 욥의 소유가 배가 되는 은혜가 임합니다(42:10-12). 그리고 10명의 자녀를 다시 얻게 됩니다(42:13). 그는 천국에서 20명의 자녀를 만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것입니다(1:2, 42:13).

결론적으로, 마지막 구절을 음미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현세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18:28-30);

아무쪼록 그와 같은 현세적인 보상과 내세적인 영생의 구원을 모두 누리시기에 합당한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