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80강(눅19: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24. 03:18

누가복음 강해 180(19: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31()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19:1-6)

 

18 마지막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리고 성밖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18:35-43). 특히 그와 같은 구원사역과 치유사역의 이유에 대하여 바디매오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42).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계시는 바디매오의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바디매오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소망에서 비롯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믿음으로 보입니다; “맹인이기 때문에 바디매오 자신은 세상에서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거지가 되어 구걸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꼼짝 없이 굶어 죽을 처지입니다. 그는 맹인 거지이기 때문에 여리고 성안에 거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빈민들이 살고 있는 성밖에 거주하면서 성문입구의 시장에서 동냥을 하면서 그저 죽을 때까지 연명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생입니다. 다만 그래도 단념할 수가 없는 한가지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록 꿈과 같은 일이겠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어 주신다고 하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리스도가 바로 다윗의 자손인 나사렛 예수라고 믿고서 그를 만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18:37-43).

그와 같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는 희망이 없는 사람 바디매오에게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앞으로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내에서 그리고 베다니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행하시게 되는 사역의 내용과 목적을 다음과 같이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게 됩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와 같이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대상이 대표적으로 여리고 성내에서는 세관장 삭개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9:1-10). 같은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11장에서 베다니의 나사로와 가족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구원받은 삭개오나 나사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9장에서 므나의 비유로서 설명을 해주시고 계십니다(19:11-27).

(3)   셋째,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민만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오시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잘못 알고서 크게 환영을 하고 있습니다(19:28-40). 그와 같이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선민만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기에 그들의 예루살렘 성이 미구에 망하고 성전도 붕괴되고 것입니다(19:41-44).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애도하면서 앞으로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모두 회개하고서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4)   넷째, 예수님께서는 잘못 사용이 되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을 차제에 청결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19:45-48). 그리하여 만민이 함께 기도하는 집으로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이 되기를 희망하시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19:1-2);

(1)   의사 누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먼저 서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시간은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제자로 받아 들이고 함께 성안으로 들어간 때입니다. 둘째, 장소는 여리고 성안에 있는 성읍입니다(19:1). 참고로, 바디매오는 맹인 거지로 살고 있을 때에는 성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서 머물 수가 없는 신세였습니다. 거지는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수시로 난전(亂廛, 정식 건물을 갖춘 시장이 아니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있는 시장을 말함) 열리는 성문 바깥에서 지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디매오는 이제 맹인신세를 면하고 버젓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함께 여리고 성안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감회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2)   바디매오와 같은 감격을 앞으로 누리게 사람이 여리고 성내에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입니다(19:2a).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수입품에 대하여 관세를 매기고 있는 여리고의 세관의 우두머리입니다(19:2b). 로마제국을 위하여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삭개오는 연봉도 높지만 처음부터 경제에 관심이 많은 부자로 보입니다(19:2c).

(3)   참고로, 의사 누가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발굴하여 독점적으로 그의 복음서에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바디매오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사례는 예수님께서 어째서 세상에 오셨으며 어떠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19:3-4);

(1)   여리고 세관의 우두머리인 삭개오는 유대인이지만 동족으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는 자입니다. 높은 관세를 거두어서 전부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대표적인 소비도시 예루살렘의 물가가 얼마나 높아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의 앞잡이인 세관원들을 매국노이며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우두머리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그러한 분위기를 알고 있기에 삭개오는 좀처럼 세관 밖으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2)   그러한 삭개오가 과감하게 시내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유는 갈릴리의 선지자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관심이 엄청 많은데 마침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내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마디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19:3a). 그리고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서 말씀을 들어보고 싶어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아무래도 다음과 같이 그의 직업과 관련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첫째, 그는 억울합니다. 로마의 세법에 따라서 정당하게 관세를 징수하여 적법절차로 로마당국에 바치고 있는데 그것을 동족인 유대인들이 범죄행위라고 몰아 부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관세를 임의로 매기고 있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보고 있는지 그것이 억울한 것입니다.

2)      둘째,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통념을 뛰어넘어서 갈릴리의 선지자 예수가 가버나움의 세관원인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5:27-32). 그러므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견해를 들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내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이 나돌자 순식간에 성읍의 주민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미 많은 무리들이 길의 좌우에 운집해 있습니다. 세관원에서 나온 삭개오는 길로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가지의 핸디캡 때문입니다;

1)      첫째,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주민들이 틀림없이 자신을 보면 비난할 것입니다. 민족의 배신자 매국노이며 로마제국의 앞잡이라고 욕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라고 정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집한 무리들을 피하고 싶습니다.

2)      둘째, 멀찍이 서서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키가 작기 때문입니다(19:3b).

(4)   따라서 삭개오는 마지막 방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다소 세관장 체면에 손상이 가겠지만 그래도 선지자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 길가에 서있는 무화과나무 가지 위에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어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19:4).

셋째로,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19:5-6); 구절에 불과하지만 속에는 복음적인 말씀이 체계적으로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1)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19:5ab); 창세기 1장을 보면, 태초에는 땅이라고 하는 소재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1:2). 그것은 마디로, 무질서하고 서로 만남이 없는 흙덩이만이 암흑의 세계를 떠돌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질서를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흙이라는 소재가 서로 만날 있도록 섭리하여 불꽃이 일어나고 생명을 만들어내도록 조치를 하십니다. 결과 무질서한 세계가 질서의 세계로, 그리고 만남이 없는 세계가 만남의 세계로, 생명이 없는 세계가 생명을 잉태하는 세계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와 생명의 탄생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대목에서 다시 발생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는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주시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이 삭개오의 눈과 마주치고 있습니다(19:5a). 순간 마치 태초에 질서와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작하십니다(19:5b).

(2)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19:5c);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때가 되었으므로 그를 부르고 계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19:5c). 이제부터는 죄인으로 지탄을 받는 삭개오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다른 인생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갈릴리에서 어부인 베드로와 야고보 형제 그리고 세관원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던 음성이 이제는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에게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순종하게 되면 새로운 인생 여호와의 종이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영적인 삶이 전개가 것입니다.

(3)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19:5d); 가장 스승의 가르침과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생활을 같이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러하며 복음사역을 하는 전도여행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19:5d) 하시는 말씀은 삭개오를 제자로 받아 들이고 공생애를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의 표현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부간의 가장 사랑도 함께 먹고 마시며 생활을 같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호흡을 하면서 같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4)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19:6); 삭개오가 화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calling out) 대한 즉각적이고도 긍정적인 응답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동네잔치를 하고 싶어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삭개오가 옛날의 엘리사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것인지 아니면 훗날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초대교회에 참여하게 지에 대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유대인 선민사회에서 죄인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삭개오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서 얼마나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지 모릅니다. 마음을 아시고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장면은 요한계시록 3장에 적혀 있는 대목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3:20-22).

이미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문을 열고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님들은 끝까지 믿음의 길을 완주하여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구주로 맞아 들이고 있는 삭개오와 같은 자들은 앞으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공생애적인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