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74강(눅18:9-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20. 03:38

누가복음 강해 174(18:9-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25()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의미하고 있는 (18:9-14)

 

의사 누가는 18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를 8절에서 벌써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와 18장의 불의한 재판장은 모두가 죄인인 인간들입니다. 그들이 가운데 어쩌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의 잘못을 탕감해주는 그리고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두가지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의 의로운 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은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행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환언하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불의한 청지기, 자신의 보신책만을 생각하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로운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는 새로운 인간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믿음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모두가 구원을 얻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불의한 종과 재판장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인인 인간 인죄론(人罪論, 죄인인 인간에 대한 논리와 관념)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제자들의 변화 받은 삶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형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마디로,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실천하는 믿음생활을 하게 되면 죄인인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며 영생을 누릴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사 누가가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자료를 어떠한 시각으로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진술하느냐에 따라서 주제와 의미가 약간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누가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과정을 시간적으로 따라가면서도 주제별로 자료를 모아서 진술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생전의 제자가 아니며 더구나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지낸 사도조차 아니었기 때문에 자료의 정리와 진술에 있어서 상당히 학문적인 객관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포함하여 18장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상의 연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째,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 새로운 인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8:8).

(2)   둘째, 새로운 인간형은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죄인들에게서 발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18:13-14).

(3)   셋째,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이익과 보신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아버지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8:17).

(4)   넷째, 자신의 인생과 재물이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므로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사용한다는 인식이 없으면 영생을 얻는 삶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8:22).

(5)   다섯째, 그러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세상에서는 바보와 꼴통이라고 멸시와 배척을 받을지 몰라도 부활의 내일을 맞이하게 됩니다(18:33).

(6)   여섯째, 육신적인 치유에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는 자가 새로운 인간형이며 구원을 얻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8:42-43).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18:9-10);

(1)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생각에 누구의 생각을 맞추는가에 따라서 가지의 종교행태가 존재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생각에 신의 생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의 생각에 사람의 생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전자가 소위 우상문화이고 후자가 하나님신앙 특징입니다.

(2)   그런데 율법선생이라고 불리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사제지간에 대를 이어서 연구한 바에 따르게 되면 율법을 준수하고 있는 자신들이 의인들이므로 여호와께서도 자신들에게 율법선생으로서의 권위를 주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18:9a). 또한 그들은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의 삶과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다른가를 설명하면서 그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며 한없이 멸시하고 있습니다(18:9b).

(3)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직접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면 반발이 거셀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를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가지 비유의 말씀을 꺼내십니다. 그것이 이른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18:9c). 비유는 먼저 예루살렘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18:10a).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사람은 세리입니다(18:10b).

둘째로,바리새인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드리나이다 하고”(18:11-12);

(1)   사람이 예루살렘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고 있지만 기도하기 위하여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은 각각입니다. 바리새인은 중앙에 서서 소리로 기도를 시작합니다(18:11a). 내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있게 것을 여호와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18:11b).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의 비교대상은 각종 토색, 불의, 간음과 같은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들 그리고 동족들이 수입하는 물품에 높은 관세를 거두어서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세관의 세리와 같은 로마제국의 앞잡이들입니다.  

(2)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선민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들은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멸시하거나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1)      출애굽기 19장의 내용을 참고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으로 삼으신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 선민들이 하나님 앞에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19:5-6). 그러므로 선민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려주는 제사장나라가 되어야 하며, 이방인들을 심판하지 말고 구원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여호와께 중보기도를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런데 선민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그와는 반대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인과 이방인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거나 속죄의 제사를 드려줄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반대로 그들을 정죄하고 자신들만이 의인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선민을 세우신 목적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는 처사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둔감해져버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일주일에 이틀 금식하는 행위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성전에 바치는 행위를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있습니다(18:12). 그것은 유월절 밤에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해주신 여호와의 은혜를 생각하면 결코 생색을 일이 아닌 것입니다(12:12-14).

셋째로,세리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8:13);

(1)   세리는 성전의 한쪽 구석에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18:13a). 왜냐하면, 자신이 자꾸만 죄인으로 여겨져서 감히 여호와 앞에 서기가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동족들이 자신을 로마제국의 앞잡이이며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로도 높은 관세를 물리고 돈을 세금으로 거두어서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있으니 할말이 없습니다.

(2)   비록 먹고 살기 위해서 세관원 노릇을 하고 있지만 동족들 보기에 부끄럽고 여호와 앞에 죄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18:13b).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디 긍휼을 베푸셔서 그와 같은 죄인으로 살지 않아도 되도록 살길을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18:13c 의역).

넷째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바리새인이 아니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14);

(1)   예수님께서 친절하게도 비유의 결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는 죄인인 세리의 기도가 마음에 드셨다는 것입니다(18:14a). 왜냐하면, 죄인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있는 바리새인의 종교적인 교만과 자랑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14b).

(2)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자와 그러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습니다. 세리가 전자라면 바리새인들은 후자에 속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과 달리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하나님께 드리고 있으니 율법적으로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대적 의로움이 생명을 살리는 절대적인 선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수가 있는 자는 선민의 의무를 다하는 자입니다. 성도들도 당연히 그러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죄인과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무릅써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원수를 용서하며 그들도 구원을 받아 함께 영생구원을 누릴 있도록 해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러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