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72강(눅17:31-3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9. 19:45

누가복음 강해 172(17:31-3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23(주일)

 

주님의 재림과 종말심판을 대비하는 성도의 삶에 대하여(17:31-37)

 

본문은 바로 앞의 문단과 연결이 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롯의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17:28-30). 롯의 가족들이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소돔 성을 떠나게 됩니다(19:15-17). 그들의 안전이 확보가 되자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읍 등에 유황불이 내려 멸망이 오게 됩니다(19:23-25). 그렇지만 성읍에 두고 재물이 아까워서 되돌아보던 롯의 아내는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19:2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한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17:30).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그날을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삶을 살아가라고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강조하십니다(17:31-37);

(1)   첫째, 롯의 처와 같이 타버리는 재물이 아까워 되돌아보거나 세상에 대한 미련때문에 구원의 길을 포기하고 되돌아가지를 말라고 하십니다(17:31-32).

(2)   둘째, 세상의 재물과 삶의 터전이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목숨을 보전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자신의 목숨구원과 영생구원을 얻을 있습니다(17:33).

(3)   셋째,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마치 유월절 밤과 같은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옛날 애굽에서는 여호와께서 장남만을 죽이셨지만 그와는 달리 많은 심판과 희생이 발생할 것입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믿는 자는 천사에게 이끌려 구원을 얻겠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세상과 함께 멸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7:34-36).

(4)   넷째, 언제 어디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것인지 사람들이 정확하게는 수가 없겠지만 마치 천재지변을 본능적으로 미물들이 먼저 감지하듯이, 제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징조를 어느 정도 예지를 수가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언급을 하시고 계십니다(17:37).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위에 있고 그의 세간 집안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1-32);

(1)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지켜야만 하는 행동요령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날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종말심판과 구원을 위하여 재림하시는 날입니다(17:31a). 그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임하던 유황불 심판이 전면적으로 시행이 되는 날입니다(19:24-25). 그러므로 그날의 의미를 알고 있는 성도들은 옛날 롯의 아내가 행한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17:32, 19:26). 천사들이 구원하고자 손을 잡아 끌게 되면 뒤를 돌아다보지 아니하고 탈출을 해야만 합니다. 만약 롯의 아내처럼 불타고 있는 성읍에 두고 나온 세간살이와 재물이 아까워서 뒤로 돌이키게 되면 곧바로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것입니다(17:31b).

(2)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와 같은 비상사태를 대비하기 위하여 평소에 예비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도상훈련이나 민방위훈련도 적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예비훈련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평소에 예비훈련을 받아 두게 되면 막상 실제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효과적으로 대비를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로 성도들은 평소에 예비훈련을 받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유는 언제 부지불식간에 주님의 재림이 임할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24:36, 1:7).

(3)   예비훈련의 내용은 살림살이와 재물에 대해서 너무 미련을 가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천국잔치의 초청에 응하지 아니하는 것은 초청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14:18-21). 그러므로 먹고 사는 일이 바쁘거나 사업에 분주하더라도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 가운데 다시 파악하고 음미하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혼구원을 위하여 주신 재능과 재물을 사용하는 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평소에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막상 그날이 되더라도 크게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의 기본자세는 하나입니다; “주신 인생과 재물을 주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용하고자 합니다. 일을 제대로 하다가 아버지께 돌아갈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소원만은 들어 주실 믿습니다”.

둘째로,무릇 자기 목숨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이요, 잃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리리라”(17:33);

(1)   그대로 직역을 하게 되면 마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훈시를 듣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전쟁에 임하여 서로 목숨을 살리겠다고 도망을 치게 되면 반드시 전투에서 패하여 모두가 죽고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전투를 치르게 되면 반드시 승리를 얻고 가족과 나라를 지켜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정도의 의미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숨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근본을 깨달으라고 하는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2)   세상의 재물과 살림살이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서 수단을 고수하고자 집을 떠나지 아니하게 되면 하늘의 유황불심판으로 성읍이 멸망을 당할 때에 함께 불에 죽고 것입니다(17:33a). 반면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과 능력으로 자신의 목숨이 보전이 되고 있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성도들은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서 불심판의 현장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언제 주님의 재림과 종말심판이 임하더라도 넉넉하게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잃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리리라”(17:33b).

셋째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밤에 둘이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어떤 사본에는,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17:34-36);

(1)   34절은 의미상 밤에 두사람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중에 종말심판이 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사람은 남자로 보입니다. 가운데 사람은 구원을 얻을 있도록 휴거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대로 방에 남겨진 성읍과 함께 멸망을 맞이하고 맙니다.

(2)   35절은 밤이 아니라 낮입니다. 그리고 장소는 집입니다. 여인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그만 종말심판의 날이 임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여인은 휴거가 되고 구원을 얻습니다. 반면에 여인은 집안에 남겨진 성읍의 멸망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3)   36절은 개역개정판에서는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의 어떤 사본에서는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17:36)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의미는 집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종말을 맞이하는 경우입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사람은 휴거를 당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반면에 사람은 밭에 그냥 버려져 있다가 유황불심판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4)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남녀의 구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종말이 임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확률이 반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셋째, 집안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종말심판과 구원은 그대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5)   그렇다면 멸망과 구원을 판가름하고 있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종말심판의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느냐 또는 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접할 준비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을 닮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도 재물도 전부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라고 주신 것이므로 뜻대로 사용하고서 창조주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영생구원이 종말심판의 와중에서도 주어질 것입니다.

넷째로,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17:37);

(1)   제자들의 관심사항은 언제 종말심판이 임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24:3). 그런데 본문에서는 다릅니다. 질문 자체가 어느 곳에 종말심판이 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17:37a). 그렇다면 여기서는 어째서 언제’(when) 아니고 어디에’(where) 묻고 있는 것일까요?

(2)   질문을 하고 있는 자들이 유대인출신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출애굽기에서 있는 여호와의 심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애굽인에게는 심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배려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8:21-22, 9:4, 25-26);

1)      그러므로 애굽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심판이 임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서는 재앙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8:21-22). 따라서 유대인 제자들은 심판이 임하는 곳과 구원을 받는 곳이 분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선민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는 심판이 아니라 여전히 구원이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2)      그러한 그들의 생각을 수정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선민에게는 구원을, 이방인에게는 멸망의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하는 선민주의적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요컨대, 종말심판과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심판 구원의 범위는 전방위적인 것입니다. 마치 번개가 서쪽 끝에서부터 동쪽 끝까지 단번에 번쩍이듯이 모든 지역을 망라하고 있습니다(17:24).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의 질문은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한 제자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가지의 언급을 하십니다. 하나는 본문에, 하나는 마태복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1)      이르시되, 주검 있는 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17:37b); 독수리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매우 눈이 밝은 독수리는 주검이 있는 곳을 발견하게 되면 사정없이 급강하를 합니다. 그러한 독수리 떼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들이 살고있는 지역과 사회에서 무죄한 자의 죽음이 억울하게 발생하고 있지는 않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많은 독수리 떼가 피냄새를 맡고서 몰려들고 있다면 그곳에는 종말심판이 임박하고 있다는 징조가 것입니다.

2)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 세상 모든 곳에 종말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임한다고 한다면 언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습니다. 세상에 천국복음이 전파가 되면 바로 그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사람은 구원을 얻고 사람은 멸망에 던져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25:31-33, 45-46)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순한 양처럼 살다가 영생구원을 의미하는 오른쪽으로 분류가 되고, 사람은 버릇 없는 염소처럼 살다가 영벌을 의미하는 왼쪽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는 자의 상징수가 144천명이라고 하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의 기록과 비교하면 얼마나 관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소망을 가지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언제나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종말심판이 임하더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으실 것입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