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73강(눅18: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9. 19:46

누가복음 강해 173(18: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24()

 

불의(不義, 의롭지 못함) 종과 불의한 재판장의 유사성에 대하여(16:1-8, 18:1-8);

 

의사 누가는 16장에서 불의한 종이 행한 지혜로운 일에 대하여 주인이 칭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16:8-9).

그리고 18 본문에서는 불의한 재판장이 행한 지혜로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칭찬하고 계시는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하시니라”(18:5-8).

위의 가지 비유와 예수님의 설명을 참조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비유에서 등장하고 있는 종과 재판장은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자들입니다(16:1-2, 18:2).

(2)   둘째, 그렇지만 이기적인 목적으로 행한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씩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의한 종은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빚진 자들에게 탕감의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16:4-7). 그리고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가 간청하고 있는 원한을 풀어주고 있습니다(18:5).

(3)   셋째, 그들 불의한 종이나 재판장들은 일종의 도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비유 가운데 등장시키고 있는 인물들인 것입니다.

(4)   넷째,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시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과 재물과 권력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민을 영생 구원하는데 사용하도록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불의한 종과 재판장이 우연히 보신책(保身策, 자기보호 방법)으로 선택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올바른 종과 재판장이 여호와의 뜻을 알고서 그렇게 실천한다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며 칭찬을 하실 것인지를 금방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는데”(18:1-2);

(1)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모인 무리들에게 선포하시고 깊은 내용을 시간이 때마다 제자들에게 따로 가르쳐 주십니다. 16장과 17장에 이어서 18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따로 제자들에게 복음의 깊은 내용을 가르치시는 일이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16:1, 17:1, 18:1). 가운데 16장에는 불의한 옳지 않은 청지기에 관한 비유의 말씀이 있고(16:1) 여기 18 본문에서는 불의한 재판장에 관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18:2).

(2)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면서 낭비를 하고 있는 자입니다(16:1). 그에 비해서 불의한 재판장은 자신에게 재판할 권한을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판결을 하면서 사람을 무시하고 있는 자입니다(18: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통하여 배울 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이유가 속에 숨어 있다고 하십니다(18:1). 그것이 무엇일까요?

둘째로, 도시에 과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18:3-5);

(1)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어떤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말씀드리고 부디 원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18:3). 그런데 호소가 금방 긍정적인 응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재판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있는 불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18:4). 그러므로 과부는 자신의 호소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 재판장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2)   예수님의 비유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과부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자신을 괴롭게 하고 번거롭게 하는 것을 재판장이 견디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8:5ac). 그러므로 민원을 해결해주려고 합니다(8:5b). 그것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도하면 결국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비유 가운데에는 놓칠 수가 없는 가지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1)      첫째, 과부의 민원(民願)입니다. 고대 율법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으로 보살핌과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대상입니다(10:18-19). 그런데 과부에게 어려움이 닥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은 우선적으로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2)      둘째, 과부의 생존의 문제보다 심각한 원한의 문제입니다. 사회적으로 과부는 약자이며 재판장 외에는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게 되면 무죄한 약자의 피가 사회적으로 계속 흘러 넘치게 것입니다.

3)      셋째, 그와 같은 율법적으로 돌봄의 대상인 과부의 생존과 원한해결의 호소가 아니라고 한다면 끈질기게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이기적인 기도에 대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삼가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주께서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18:6-7);

(1)   불의한 재판장이 과부의 호소를 들어주고 있습니다(18:6). 그런데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어찌 과부의 호소를 들어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18:7)  다만 문제는 긍정적인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 기도할 있는 택하신 성도들의 믿음 필요합니다.

(2)   그런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입장이 옳다고 강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1)      올바른 믿음이란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자신의 생각과 뜻보다 항상 옳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기도로 밀어 부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2)      인간의 좁은 생각은 항상 자기입장이 우선이며 기껏해야 집단 이기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모두의 형편을 두루 살피시면서 성도의 기도를 검토하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모두의 생명을 돌보고 살릴 있는 최선의 대안을 항상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걸립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믿고서 기다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넷째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

(1)   예수님께서는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들과 성도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실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18:8a). 그렇게 말씀하실 있는 근거가 이스라엘의 히브리 정경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가나안 원주민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많이 행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여호와께서 쫓아내시고 땅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고 있습니다(15:16, 9:4). 둘째, 다윗 왕조 므낫세 왕의 악행이 워낙 심하고 예루살렘에서 무죄한 자들의 피가 많이 흐르고 있습니다(왕하21:16).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옛날 아모리 족속의 경우보다 심하므로 반드시 다윗왕조의 유다왕국을 멸망시켜버리실 것이라고 주전 650년경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왕하21:11-13). 말씀은 70 이내에 실현이 되고 맙니다.

(2)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조치라고 하는 것은 역사 가운데서 바라보게 되면 생각보다 빠르고 정확하십니다. 다만, 문제는 사람들이100 안팎의 짧은 인생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남은 인생 가운데 하나님 말씀의 실현을 수가 있을지 아니면 수가 없을지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생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게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자신은 비록 짧은 인생을 살다가 열매를 모두 얻지 못하고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수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11:1). 그러한 영적인 깨달음과 믿음이 귀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b).

결론적으로, 세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내용도 대부분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피조물 모두의 형편을 살피고 기도에 응답을 때까지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립니다.

(2)   둘째, 사람들은 정의를 부르짖으며 흔히 집단 이기적인 입장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른 집단에 대하여 위해를 가하고 있는 그러한 기도에 대하여 흔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셋째,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기도의 내용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두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헌신하고자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긍정적인 응답을 즉시 얻게 것입니다(12:1-2).

  그러므로 이기적인 기도나 인간의 정의에 입각한 기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을 헤아리는 그러한 믿음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와 같은 공의에 입각한 믿음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