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71강(눅17:26-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8. 01:59

누가복음 강해 171(17:26-3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22()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세상사람들은 여전히 구원보다는 심판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17:26-30);

 

의사 누가는 본문의 말씀을 이해할 있도록 가지의 용어를 사전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앞서 등장하고 있는 용어, ‘인자의 ’(17:22)  인자도 자기 날에’(17:24) 그것입니다. 여기서 인자의 이라고 하는 뜻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있는 의미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자도 자기 날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벗고 무덤에서 부활하여 새로운 몸을 입고서 독생자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라고 수가 있습니다.

차이를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전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생애의 끝이 바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맞이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단 십자가 처형이 되시고 나면 제자들은 다시는 생전의 예수님, 인간의 육신을 가지시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전도여행을 하시던 때의 스승님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에 부활의 주요 심판의 주로서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대하게 것입니다.

후자 인자도 자기 날에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인간의 육신을 벗고 새로운 몸을 입으신 때입니다. 새로운 몸을 흔히 부활의 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은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영적인 몸입니다. 영이란 본래 눈에 보이는 모양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천사들이 인간세상에 특별히 들어와서 짧은 기간 현신을 때에는 사람의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천사의 모습이 그러합니다(18:1-2). 그리고 출애굽기에서는 모세도 역시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하시는 여호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율법을 전수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3:4-4:17, 20:22-21:1).

(2)   둘째, 부활의 몸은 영적인 것이므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치 번개처럼 동시에 서쪽에서 동쪽에까지 임재를 하며(17:24), 순식간에 모든 제자들에게 한꺼번에 임할 수가 있습니다(17:23, 14:17-20).

요컨대,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여 영적인 몸을 입으시고 부활의 주이며 심판의 주가 되시는 엄청난 변화가 몇달 후에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7:22-25). 그렇지만 세상사람들은 별로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공생애를 사시는 때나 부활하여 심판주의 영광을 보이시는 때나 도무지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하던 평상시 그대로 먹고 마시며 혼인을 하고 또한 재산을 늘리기 위하여 분주할 따름입니다(17:26-30). 그렇게 철저하게 세상 낙을 추구하며 육신적인 삶만을 살고자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선민 이방인 구분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멸망의 대상이 되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녹아 있는 본문입니다.

이제부터 점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노아의 때에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 나서 그들을 멸망시켰으며”(17:26-27);

(1)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최초의 심판은 노아의 홍수 때입니다(6:5-8). 심판을 100여년 앞두고서 노아는 여호와로부터 한가지 예언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6:3). 하나님을 섬기던 백성들도 타락하여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변하고 말았기에 여호와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6:2-3). 사람들이 포악해지자 짐승들도 흉포화되고 약육강식의 피가 땅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6:11-13). 그러한 부패한 세상을 바라보시고 땅에 사람을 지었음을 한탄하신 여호와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고 마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2)   하나 구원을 얻을 자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입니다(6:8). 그리고 홍수심판 세상에 동물들을 유전시키기 위하여 노아의 가족 8인과 세상의 동물들을 쌍쌍이 태울 있는 방주를 잣나무로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6:14-22). 결과 방주에 타게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만약 노아가 100 이상 짓고 있는 거대한 방주의 건립을 바라보면서 그의 이웃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나아갈 있는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한 관심을 보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 나서 그들을 멸망시켰으며”(17:27); 하나님의 경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아니하던 세상사람들은 전부 홍수심판으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3)   그와 같은 노아 시대의 일이 예수님 당시에도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십니다; “노아의 때에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17:26). 참고로, 그와 같은 예수님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비유가 누가복음 14장에서 이미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청인사들은 하나같이 참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비유로써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천국잔치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 담합을 하여 잔치에 가지 말자고 합니다. 그래서 변명하고 있는 이유가 가지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밭을 샀기 때문에 농토에 나가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농사지을 소를 10마리나 샀으므로 5겨리로 묶어서 이제는 밭을 가는 연습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장가를 들었으므로 이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세상일을 핑계로 선민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일제히 거부하자 여호와께서는 초청인사를 변경하십니다. 그때부터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과 이방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14:16-24).  

둘째로,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17:28-29);

(1)   언뜻 보면, 앞선 단락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조금 깊이 있게 묵상을 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노아의 홍수심판 때에는 사람들이 주로 먹고 사는 일에 그리고 장가들고 시집을 가는 일에 바빴습니다(17:27).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고 사는 일에 바빴기에 하나님의 경고에 신경을 있는 여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속적인 이유가 예수님 당시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17:26).

2)      그런데 14장의 내용을 참조하게 되면 이유가 약간 달라지고 있습니다; 기초적인 생계문제의 해결과 혼인문제에서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먹고 살기 위하여 바쁘다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있습니다. 또는 결혼하여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분주합니다. 결과 하나님의 일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14:18-20). 참고로 여기서 밭과 소를 많이 사고 있는 것은 유대인사회가 농경사회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 당시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가 농경사회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옛날 롯이 살고 있던 소돔이나 이웃인 고모라는 상업도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도시의 주민들은 다음과 같은 일에 분주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17:28).

(2)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이유가 위와 같이 세가지입니다; 노아의 이웃과 같이 기본적인 생계문제와 결혼문제에 매어 달려서 노아의 방주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선민들처럼 살기 위하여 농토를 늘리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분주하여 천국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롯의 이웃인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각종 상행위와 건축일로 자본을 증식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불심판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가지의 이유가 과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있는 변명이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시대에도 홍수심판이 있었고 롯의 시대에도 하늘에서 유황불 심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7:27-29).

셋째로,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17:30);

(1)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가지의 경우는 사실 전면심판이 세상에 임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첫째, 노아의 홍수심판은 코로 호흡을 하는 생물에 국한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물고기는 전부 제외가 되고 있습니다(7:20-23). 둘째, 롯의 시대 유황불심판은 염해 남쪽의 상업도시인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 4성읍에 국한이 심판입니다(19:23-25, 29:23). 셋째,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되는 유대교지도자들과 선민들에 대한 심판도 주후 70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대한 심판에 머물고 있습니다(19:41-44).

(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부활하시고 장차 세상에 심판주로 오시는 그때에는 어떠한 심판이 임하게 될까요? 그것은 가지의 시점으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선민 유대인들이 어떠한 변화를 보이게 될까요? 둘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훗날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에 종말심판의 때에는 어떠한 변화가 예상이 될까요? 경우 모두를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17:30). 마디로,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주후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인류는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서 영적인 삶을 뒤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하여 세상적인 일에 더욱 분주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사함과 부활 그리고 천국을 가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한 인류문명의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예언이 우려의 말씀으로 본문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차제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음성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