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68강(눅17:11-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7. 03:54

누가복음 강해 168(17:11-1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19()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4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10명의 나병환자 이야기(17:11-19).

 

17장에서 의사 누가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믿음과 권능 그리고 믿음과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여러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아니하도록 올바른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17:1).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이 상대방보다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으로 남을 비판하고 또한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외식적인 믿음생활에 젖어들게 되면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17:2-4).  

다음에는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께 자신들도 스승님처럼 권능을 행할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17:5). 그것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특별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있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라면 3 이상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하면서 복음사역을 나누어서 수행하고 있는 사도들이 원하고 있는 믿음은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복음사역을 강력하게 실시할 있는 특별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7:7).

그러한 특별한 믿음은 자연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치와 질서를 때로는 어그러뜨릴 수가 있는 것이기에 함부로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17:6). 그러므로 그러한 특별한 믿음을 얻을 있는 자는 자신의 생각과 뜻보다는 항상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앞세울 수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신실한 종의 모습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로써 사도들에게 설명을 해주시고 계십니다(17:7-10).

다음에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믿음에도 4가지의 단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17:11-19);

(1)   첫번째 단계는 예수님에게 가서 긍휼을 호소하게 되면 어떠한 질병이나 장애라도 고침을 받을 수가 있다고 확신하는 믿음입니다(17:11-14).

(2)   둘째 단계는 치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믿음입니다(17:15).

(3)   셋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인 알고서 엎드려 감사를 드리는 믿음입니다(17:16).

(4)   넷째는, 사함과 구원을 얻을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선민 이방인 상관이 없이 누구든지 얻을 있는 것입니다. 치유함을 받은 자가 이제부터는 육신적인 치유에 그치지 아니하고 남은 인생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본문에서는 사마리아 사람 사람만이 그러한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17:15-18). 따라서 그는 감격스럽게도 예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얻고 있습니다; “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7:19).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7:11-13);

(1)   의사 누가는 사건이 발생한 때와 장소를 먼저 기술하고 있습니다;

1)      때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시기입니다(17:11a). 동안 3년을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하시다가 공생애 마지막 6개월을 남겨놓으시고 단단히 결심하시고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신 예수님이십니다(9:22).

2)      남하의 과정 중에 사마리아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라고 남행을 하시는 것으로 표기를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17:11b). 이유는 아무래도 이미 유대 땅에 들어오셔서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오는 도중에서 겪은 일을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2)   마을에 10명의 나병환자가 살고 있습니다(17:12a). 그들은 격리가 오지(奧地, 멀리 떨어져 있는 원시의 )마을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전염병 환자들입니다;

1)       고대사회에서는 나병이 불치의 전염병이며 병에 걸린 자는 부정하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13:8, 45). 따라서 격리의 대상입니다(13:46). 그런 까닭에 마을은 다른 동네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깊은 산골마을로 보입니다. 그러한 오지에까지 찾아가서 복음사역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여기서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 일행이 그들의 마을로 접근하고 계시지만 10명의 나병환자는 직접 영접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덕에 멀리 서서(17:12b)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7:13). 병은 낫고 싶지만 직접 만나서 치유함을 받을 수가 없는 나병환자들의 안타까운 심정과 격리된 서러움이 진하게 배여 있는 그들의 외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가장 기초적인 번째의 믿음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거리에서 말씀 마디만 하셔도 충분히 불치의 병을 고칠 있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9:20).  

  둘째로,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였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7:14);

(1)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딱하게 여기시고 불쌍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17:14). 그것은 나병에서 낫도록 조치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즉시 나병을 낫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서 길을 가게 되면 도중에 치유가 되도록 조치한 것입니다”(17:14b 의역). 그것은 마치 옛날 선지자 엘리사의 시대에 아람왕국에서 군대장관 나아만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왕하5:1, 10-14).

(2)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사보다 자비롭습니다. 강물을 찾아가서 일부러 목욕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나병이 낫게 되면 제사장을 찾아가서 몸을 보이고 완쾌되었다는 선언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13:16-17). 그러므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7:14a) 지시하십니다.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가던 10명의 나병환자는 동시에 모두 병이 깨끗하게 나았음을 경험하게 됩니다(17:14b).

셋째로, 중의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17:15);

(1)   동네에 살고 있던 10명의 나병환자가 모두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은혜로 나음을 얻게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제사장을 찾아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이 하나같이 깨끗하게 낫게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17:14).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9명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행운에 그만 만족을 하고 맙니다.

(2)   하지만 사람만은 달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 가운데 얻을 있는 단순한 행운이 아닌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불치의 나병환자로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갈릴리의 선지자 나사렛 예수님을 통해서 지병을 깨끗하게 고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나음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1)      불치의 전염병인 나병으로 말미암아 격리가 삶을 살아오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흔치 아니한 경험입니다. 이제 확률이 낮은 기적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분명히 그러한 조치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나병에서 낫게 10 가운데 사람만은 그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2)      그래서 그는 제사장에게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을 향하여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는 도중에 그는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나병을 낫게 해주시니 여호와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영광의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17:15 의역). 그것은 자신을 낫게 해주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진실로 새로운 인생을 있는 믿음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3)      그래서 사람은 마음 속으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지 차제에 알려주십시오. 육체가 낫게 되는 경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서 천국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먼저 그리스도를 찾아가서 제자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이 되어 많은 사람을 치유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 3, 4 믿음생활을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예수의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10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9 어디 있느냐? ”(17:16-17);

(1)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모든 일을 끝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17:15). 자신을 치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부러 예수님을 보내어 주신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찾아와서 발치에 엎드려서 감사를 드립니다(17:16a). 그와 같은 감사의 자세는 앞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다니면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마음의 다짐이라고 하겠습니다.

(2)   사람이 사마리아 출신임을 예수님께서 파악하고 계십니다(17:16b). 이마에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써서 붙이지도 않고 있는데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나병을 낫게 해주시고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10 가운데 명이 자신을 찾아올지 은근히 기다리시면서 그들의 신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1)      그들은 모두 격리된 나환자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나병이 낫게 되면 그때부터는 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9). 옛날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이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앗수르 사람과 혼혈이 되어 버렸기에 선민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왕하17:23-24).

2)      그런데 그와 같은 역사적이고도 인위적인 차별과 구분이 예수님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고 발치에 앉아서 제자의 예를 올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나머지 9명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행로와 마음가짐을 알고 계십니다; “갈릴리 출신 유대인 나병환자 9명은 제사장을 찾아가서 신원이 회복이 되면 남은 인생을 멋있게 살아보고자 하나같이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옛날의 선민사상으로 되돌아가버릴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시는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병이 나았으므로 어엿한 선민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의 병은 여전히 예수님께 와서 고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도 답답하여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외치고 계십니다; “10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9 어디 있느냐?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17:17-18).

다섯째로,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믿음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7:18-19);

(1)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본래는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17:18).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방인들이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제자로 살아가고자 결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민 유대인들에게 똑똑하게 말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모두들 여호와의 종으로 제대로 살아갈 있기를 얼마나 원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리와 율법생활에 젖어서 도무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2)   그들이 원하고 잇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열심히 전하고 계시는 천국복음에 대해서는 냉담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갈릴리 유대인출신인 9명의 나병환자에게서 다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17:17-18). 그러므로 참으로 선민들에 대하여 섭섭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이기적인 선민사상과 현세축복을 원하는 우상문화는 결국 유대인사회의 멸망을 초래할 것입니다 비극을 내다보시고서 탄식하시는 예수님이시라고 하겠습니다(19:41-44).

(3)   반면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를 드리고 발치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있도록 인도해달라고 원하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함과 구원을 얻을 있는 믿음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17:19b). 그러므로 너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이제부터는 건강한 육체 뿐만 아니라 강건한 영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라는 예수님의 격려의 말씀이 뒤따르고 있는 것입니다(17:19a).

결론적으로, 100 안팎의 인생을 살다가 육신을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만 되는 것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세상 건강하게 살아보겠다고 얼마나 육신적인 삶에 매어 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벌치에서 목이 터지게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7:13).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십니다(17:14).

그런데 다음에는 여전히 사함과 영생의 구원이라는 문제가 그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육신적인 치유와는 별도로 영적인 치유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적인 치유함을 받을 있는 믿음과 영적인 치유까지 받을 있는 믿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육신적인 치유를 받을 있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외치면 어떠한 질병이나 장애라도 나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치유사역의 현장이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치유를 받을 있는 믿음은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사마리아 출신 나병환자가 본을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자신의 육신만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를 새롭게 살아갈 있도록 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찬양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리고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10:39).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며 여호와의 종으로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믿음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7:18-19). 아무쪼록 사마리아 사람처럼 영육간에 모두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여호와의 종으로 남은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