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67강(눅17:5-1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6. 12:38

누가복음 강해 167(17:5-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18()

 

믿음이란 종이 주인을 믿고 따르는 만큼 주인이 종에게 있는 것인데 그것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17:5-10)

 

본문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사도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17:5-10). 먼저 믿음이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있는 선물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수가 있습니다. 이유는 사도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에게 믿음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7:5). 그런데 믿음이라고 하는 선물을 어째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들에게 많이 주시지 아니하시는 것일까요?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서 사함을 받고 천국의 자녀로 살아가는 정도의 기본적인 믿음만을 사람들에게 허용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가지의 설명을 하시고 계십니다;

(1)   첫째, 기본적인 믿음에 더하여 주시는 특별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작은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기적을 발생시킬 있는 것입니다. , 자연계의 순리를 어그러뜨리는 현상을 발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겨자씨 알만큼 작은 믿음을 종에게 더하여 주신다고 하더라도 종들은 특별한 믿음으로 엄청난 기적을 발생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점을 알기 쉽게 땅에서 자라는 뽕나무를 바다에서 자라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을 하시고 계십니다(17:6). 요컨대, 그것은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자연의 이치를 훼손하게 되는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주 제한적으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사용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둘째, 그러하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를 뛰어넘을 있는 특별한 믿음이라고 하는 선물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자신을 순종하고 있는 종들에게만 특별히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의 순종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점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것이 본문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예화라고 하겠습니다(17:7-10).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사도들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알만한 믿음 있었더라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17:5-6);

(1)   사도들은 일반제자와는 다릅니다; 첫째, 36개월 동안 스승이신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지내고 있는 남자제자가 12사도입니다(6:66-71, 1:21-22). 둘째, 12명의 사도들이 수많은 제자들로 구성이 12개의 전도팀을 이끌고 있는 팀장들입니다(10:5-8). 그들은 이미 갈릴리에서 12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서 복음사역을 수행한 바가 있습니다. , 복음사역을 있도록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 받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12제자(사도)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0:1).

(2)   그렇게 독자적으로 전도팀을 운영하면서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말씀사역과 치유사역을 실시할 수가 있는 자들이 12사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스승 예수님에게 권능을 행할 있는 믿음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17:5).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들이 이번 예루살렘 행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되어 죽임을 당하고 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9:22).

(3)   예수님께서 부활하실지 아니하실지는 확실히 수가 없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아 돌아가실 것이라는 예언만은 확실한 같습니다. 이유는 유대 땅에서 예루살렘이 가까워질수록 바리새인들의 시비와 반발이 심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45, 53-54).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태도에 대하여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비판이 자꾸만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멀지 않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변을 당하시게 것입니다.

(4)   다음에는 12사도 자신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계승해야만 합니다. 일을 위해서는 믿음이 절실합니다. 마디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사역을 마무리하지 못하신다면 수제자들인 12사도 자신들이 메시아의 역할을 담당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자면 로마총독과 헤롯 왕가 외세를 단숨에 물리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방법이 믿음을 주님으로부터 얻는 것입니다(17:5).

(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미 필요한 믿음을 제공한 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7:6). 갈릴리 지역에서 전도팀을 나누어 지역의 성읍과 마을에 파송하였을 때에 주신 하나님의 권능만 하더라도 대단한 것임을 상기시켜준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들이 마치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백성들의 병과 장애를 고쳐주는 치유사역을 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10:1, 8). 뿐만 아니라 12사도들을 보좌하고 있는 70인의 제자들도 35개의 전도팀을 구성하여 사마리아 여러 마을에서 전도사역을 때에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사역을 행한 바가 있습니다(10:17). 그러므로 권능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권능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있는 종으로서의 자세가 부족한 것입니다(17:7-10).

(6)   사도들이 요청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통하여 실현이 되고 있으므로 자신도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기만 하면 사함과 영생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일반적인 믿음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믿음은 마치 하나님의 사자처럼 여호와의 권능의 말씀을 대언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연계의 이치와 운행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권능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뽕나무를 옮겨서 바다에 심어 자라게 있는 것과 같은 창설적인 것입니다(17:6). 그렇게 식물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오히려 작은 믿음입니다.

(7)   믿음의 사례를 훗날 사도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성전의 미문에서 앉은뱅이 걸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하게 되는 기적을 보이고 있습니다(3:1-10). 그리고 사도 바울은 3층에서 졸다가 떨어져서 죽은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을 살려내는 기적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20:9-12).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주십니다(14:16-17, 1:8). 그리하면 본문에서 사도들이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는 믿음은 성령님 안에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 받고”(1:8). 권능의 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것이요, 또한 그보다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4:12).

둘째로,너희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17:7-8);

(1)   고대 유대인들의 주된 산업은 농업과 목축업입니다. 그러므로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것이 본업입니다. 그런데 부자 지주인 경우에는 종을 많이 두고서 농사를 짓고 양을 치고 있습니다(17:7a). 그러한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아시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알기 쉽게 농촌지역에서의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가지고 믿음의 문제를 풀이하십니다.

(2)   하루 종일 종이 바깥에서 양도 치고 농사일을 돌보다가 주인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종들이 하는 일을 고맙게 생각하여 저녁식사를 있게 만찬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17:7b). 왜냐하면, 종들의 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바깥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녁에 주인집으로 돌아가서 주인의 만찬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3)   주인을 받들어 섬기는 종의 자세에 대해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유용한 선례를 남기고 있습니다; “헤브론 마므레 수풀 아브라함의 천막이 있는 정면에 여호와와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을 하고 있습니다. 정체를 눈치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 모시고 극진하게 식사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도록 시중을 정성스럽게 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충성스러운 종의 자세입니다”(18:1-8). 마디로, 그와 같은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르는 자들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입니다(17:8).

셋째로,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일을 것뿐이라 할지니라”(17:9-10);

(1)   주인을 섬기는 종의 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상급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로 정확하게 보여주십니다;

1)      첫째, 3 6개월 동안 고생스러운 공생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무엇인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불철주야 일하십니다.

2)      둘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자 많은 백성들이 각종 병자와 장애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을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일일이 고쳐 주십니다(4:40).

3)      셋째,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이기적이며 현세적으로 왜곡하여 율법생활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신앙을 바로잡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지적을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23:1-36).

4)      넷째, 결과 예수님은 그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시게 됩니다.

(2)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현세에서는 별로 위로가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육체적인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이미 경험하신 후이기 때문입니다. 마디로, 내세의 영광을 믿고서 현세의 자신의 인생과 목숨까지 모조리 하나님을 위하여 바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헌신한 종에게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허용해줄 수밖에 없으시다고 하겠습니다.

(3)   참고로,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종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1)      자신의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는 자가 신실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로지 주인의 뜻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종의 본문입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17:9).

2)      주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하찮은 종의 목숨도 내어놓아야만 합니다. 이유는 종의 목숨도 인생도 전부 창조하신 분이 주인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께서 필요하다고 달라고 하시는데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면서 내어놓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종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결과 엄청난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덤속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몸을 입고서 승천하게 됩니다(24:50-51). 사도와 제자들에게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게 되는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모든 결과는 종의 의무에 충실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목숨이 다하도록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일을 것뿐이라 할지니라”(17:10). 그리하면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믿음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7:5-6).

예수님과 같은 종의 자세가 확립이 되어 있지 않는 자에게 믿음과 권능을 주게 되면 자연을 훼손하고 수많은 성도를 실족하게 만들 따름입니다(17:1-2, 6).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여호와의 종의 자세부터 확립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용사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