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166강(눅17: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10월 17일(월)
어째서 회개하는 자를 하루 7번이라도 용서해야만 하는가?(눅17:1-4)
본문을 음미해보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기자신에 대한 인간론과 하나님께서 보고계시는 인간론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란 자기자신이 선하고 의롭다고 하는 생각을 전제로 두고서 사유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인간이란 죄인들이라고 보시고서 말씀하시기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에 대하여 단 한번이라도 용서해주기가 힘이 듭니다. 참으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한두 번은 경고를 하다가 세번째에는 용서를 해주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루에 너에게 죄를 여러 번 범하고 그때마다 찾아와서 그 잘못을 회개하면서 용서를 해달라고 요청을 한다면 그를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눅17:3-4).
그 이유는 너 자신도 죄인이며 남을 실족시키고 있는 중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눅17:1-2). 그러한 큰 죄를 범하고 있기에 처벌을 면할 수가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구원의 길을 내고 있으니 그 점을 알고서 부디 형제 용서하기를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사실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루기 위한 기초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17:1-2);
(1)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생애를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①첫째, 천국의 복음입니다. 그것은 만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의 복음으로 풀이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둘째, 치유의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사역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는 병자가 나으며 장애자가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와 제자들의 전도여행에서도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마10:1, 눅10:9, 17). 그것이 그들의 신적인 권위입니다.
(2)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이루어지고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복음도 배우고 놀라운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도 얻었으므로 사도와 제자들이 남은 평생을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일관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이 잘 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토록 책망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처럼 제자들도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져들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신앙의 선배를 따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고 또한 실족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책임을 장차 제자들에게 반드시 엄히 물으시겠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눅17:1).
(3) 믿음의 후배를 실족하게 한 그 잘못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과연 제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물으시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잘못의 크기가 제자들이 자신의 죽음으로도 청산할 수가 없는 정도의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17:2). 말씀 그대로, 목에 무거운 연자맷돌이 매어진 채 바다에 던져진다면 깊은 물속에서 떠오르지 아니한 채 숨이 끊어질 것이며 그것으로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은 그것을 넘어서는 형벌로 묻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고통 가운데 숨이 한번 끊어지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지옥의 불속에서 끊임없이 뜨거운 고통을 맛보면서도 그 숨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영벌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눅16:23-24).
둘째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7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7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3-4);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당장 처벌을 하지 말고 먼저 경고를 하여 스스로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눅17:3a).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눅17:3b). 그렇게 너그럽게 조치를 해주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 근거가 바로 장차 제자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예수님의 대속하심의 은혜입니다.
(2) 이제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본문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를 하십니다(마26:31-36). 유월절을 앞두고 그날 목요일 밤에 잡히시면 바로 금요일에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임박한 고난을 미리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두렵고 떨립니다(마26:31). 육신을 입고 있기에 죽음을 피하고 싶은 본능이 얼마나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 모릅니다(마26:39).
2)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시므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 처형장에 내놓아야만 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심히 답답하고 두렵기 그지 없습니다(마26:37). 그래서 제자들에게 스승을 위해서 밤새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마26:38).
3) 그러나 제자들은 하루의 일과에 지쳐서 그만 몸이 곤하여 잠에 빠져들고 있습니다(마26:40).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마26:41). 그렇지만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따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체포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마26:45-46).
4)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제자들입니다(마26:4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그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주십니다(눅24:49, 요14:16-17, 26, 16:7, 13-14, 행1:8).
(3) 그와 같은 죄 사함과 성령님의 임재 및 동행의 은혜까지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실 수 있는 권리가 충분하십니다;
1)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눅17:3a); 전도와 선교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적(外飾的, 겉만 그럴듯하게 꾸미는)인 신앙생활에 빠져들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기적인 신앙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에 오염이 되지 말라고 하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믿음의 후배를 엄청나게 실족시키게 되는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으로써도 청산할 수가 없는 잘못이 될 것입니다.
2)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17:3b); 그렇게 외식적인 신앙으로 믿음의 후배들을 실족시키는 형제가 있으면 그 잘못에 대하여 질책과 비난을 하기에 앞서서 우선 경고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잘못을 회개하면 그 형제를 용서해주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용서를 베풀지 말라고 하십니다.
3) “만일 하루에 7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7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4); 그런데 회개의 효과가 어느 정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회개야 말로 제자와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면, ‘탕자의 비유’의 내용이 그러합니다(눅15:11-32). 비록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해서 사전상속을 받아 세상에 나가서 전부 탕진을 해버린 탕자입니다(눅15:12-14). 그러나 그 둘째아들이 회개를 하고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자 큰 기쁨으로 잔치를 열어주고 다시 아들로 맞아들이고 있습니다(눅15:21-24). 그것이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기쁨이며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과 기쁨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루에 7번이라도 죄를 짓고 7번 찾아와서 회개를 하는 형제가 있다고 하면 기꺼이 용서를 해주라고 하십니다(눅17:4).
결론적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아들이 효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고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며 그 기쁨을 억제하지 아니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 마음으로 회개하는 형제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스스로 조심하지 아니하면 바리새인처럼 외식적인 신앙생활과 이기적이며 현세적인 축복사상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후진들을 실족시키게 된다면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목숨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로써만 가능합니다.
오로지 그 대속의 은혜로 오늘도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감사하며 전도와 선교생활에 발맞추어 성화의 삶에 한층 정진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성화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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