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64강(눅16:19-2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5. 23:45

누가복음 강해 164(16:19-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15()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의 의미에 대하여(16:19-25)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의 인생관과 재물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1)   의사 누가는 바리새인들의 선민사상과 현세주의 사상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수록하고 있습니다(16:14-18).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인생관과 재물관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상한 주체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며 모든 세상의 것들은 선민들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이 되어야만 한다고 사유하고 있습니다.

(2)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선민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선민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야만 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장차 역사섭리로 보여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선민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역사를 섭리하시는 종이라고 하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교만한 신앙입니다.

(3)   그러한 사상은 주인의 것으로 빚진 자의 채무를 탕감해주고 있는 불의한 종보다도 못한 신앙 태도라고 예수님께서 질책을 하십니다(16:8). 유대교리를 율법화하여 백성들을 교육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들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가지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의 진실을 통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한갓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불과할 따름입니다(16:15).

(4)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16:19-31). 내용은 세상에서 선민이 필요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로 세상에서 무엇을 시행해야만 천국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는지를 가장 쉽게 설명해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부자 있어 자색 고운 베옷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16:19);

(1)   고대사회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믿고 있습니다. 선행을 자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악행을 자는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부자는 인과응보사상을 지니고 있는 고대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부자는 엄청난 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16:19a). 도대체 부자가 어떠한 선한 일을 했는지는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   예를 들면, 부자는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왕족들이 입을 있는 보라 색깔의 옷을 걸치고 있습니다(16:19b). 중동과 유럽에서 왕과 왕족들이 주로 입고 있는 자색 옷은 염료를 채취하는데 가장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바다의 달팽이에게서 보라색 염료를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나중에 소아시아 두아디라 성의 상인들이 특정한 식물의 뿌리에서 보라색 염료를 채취하는 기술을 개발합니다. 그래서 성읍의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3:19). 가운데 사업으로 성공한 여자가 유럽의 도시인 빌립보로 이주하여 자주색 옷감장사를 시작합니다. 그녀가 훗날 사도 바울 일행을 도와서 유럽선교의 문을 열어준 루디아입니다(16:14-15).

(3)   부자는 신분만을 상속한 것이 아닙니다. 선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하고 있습니다. 재물의 양이 엄청 나서 매일 연회를 벌이고 값이 비싼 고운 베옷을 입어도 재물을 사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16:19c). 마디로, 그는 수저를 물고서 태어났으며 평생을 부자로서 호의호식(好衣好食,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옷을 걸치고서 살아가는 )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과응보의 사회에서 부자는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민인 부자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부자가 율법을 준수했기 때문에 그렇게 현세적인 복을 놀랍게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부자는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가며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견해는 다릅니다. 그것이 본문의 비유의 핵심입니다.

둘째로,그런데 나사로 이름하는 거지 헌데 투성이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더라”(16:20-21);

(1)   예수님은 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찮은 거지의 이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름이 나사로입니다(16:20a). 뜻은 하나님의 도움 의미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라고 불리고 있는 거지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목숨을 연명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개들이 와서 자신의 몸에 잔뜩 있는 헌데를 핥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쫓아버릴 있을 정도로 사지육신이 멀쩡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6:21b).

(2)   마디로, 나사로는 전신 장애자입니다. 그리고 피부병이 심한 병자입니다(16:2b). 그러므로 그가 생존할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자의 대문에 누워서 부자가 남긴 음식을 조금 얻어 먹는 것입니다(16:20c-21a). 평생을 불쌍하게도 전신장애자로 그리고 병자로 또한 거지로 살아가고 있는 나사로는 인과응보의 고대사회의 법칙에 비추어 보자면, 참으로 죄인입니다. 사람들이 눈치를 수가 없는 무슨 대단한 죄를 하나님께 지었기에 평생을 그러한 비참한 모습으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바리새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이며 고난 가운데 살다가 음부의 세계로 들어갈 따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셋째로,이에 거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16:22-23);

(1)   바리새인들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들리어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16:22a). 반면에 평생을 고귀한 신분으로 호의호식을 부자는 죽어서 고통스러운 음부의 세계에 들어가고 맙니다(16:22b-23a). 어째서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비유의 말씀이 진행이 되면서 나중에 이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16:25).

(2)   부자는 대문을 출입할 때마다 그곳에 누워서 불쌍하게 걸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나사로를 보았을 것입니다. 세월은 나사로가 고통스러운 삶을 마칠 때까지 계속이 됩니다. 그런데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게 베풀 있는 그의 선행이란 전신장애자인 걸인을 그의 대문 옆에서 그대로 지낼 있도록 허용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참상이 보기 싫다고 하여 종들로 하여금 번쩍 들어서 멀리 내다버리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자신이 그래도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3)   정도의 자비라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의 생각으로는 부자는 상당히 선한 일을 것이라고 볼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가 그의 선지서 53장에서 예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과 사명에서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세상에서 볼품도 없는 모습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고난에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대속의 생애이기 때문입니다.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서 백성들의 속죄를 위한 제사장으로 살아가듯이 여호와의 종의 삶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없는 고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전신장애자 거지 나사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만 합니다. 나사로는 그의 몸으로서 가나안 지역의 추위와 더위를 대문 바깥에서 평생동안 견디면서 집안에서 호의호식을 하고 있는 부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자신도 모르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거지 나사로를 돌보며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 부자의 일이며 그에게 재물의 사용처라는 것입니다. 일을 시행하지 아니하게 되면 부자는 음부의 세계로 들어가서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53:2-12, 25:34-46).

(4)   평생동안 거지 나사로를 거들떠 보지도 아니했던 부자가 음부의 고통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게 됩니다. 부럽기가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16:23b).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넷째로,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하나이다”(16:24);

(1)   부자의 부탁이란 정말 아주 조그마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자가 옛날 자신의 대문 앞에 누워있는 거지 나사로에게 공기를 주는 것처럼 간단한 것입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16:24a).

(2)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부자의 혀를 서늘하게 적셔보아야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음부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부자의 소원은 그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고생을 하고 있으면 시원한 물이 그토록 그리운 것일까요?(16:24b) 그렇지만, 그러한 조그마한 소원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음부의 세계입니다.

다섯째로,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 받고, 너는 괴로움 받느니라”(16:25);

(1)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해주고 있는 이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관한 내용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란 현세에서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서 보상을 받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보상은 현세와 내세에서의 총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현세에서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고난에 삶을 살아간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는 내세에서 보상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나사로의 고난이 부자 자신의 회개를 종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아니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간 부자는 음부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온전한 보상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적고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 받고, 너는 괴로움 받느니라”(16:25).

결론적으로,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부자는 의인이며 하나님의 상급을 세상에서 축복으로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신장애자 거지로서의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사로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음부의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반대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의 사명이 무엇인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과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재산과 인생이라는 것도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을 때에 천국의 복을 누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재삼 음미하시면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