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63강(눅16:14-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5. 05:22

누가복음 강해 163(16:14-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14()

 

어떻게 율법과 하나님나라 복음과의 관계를 이해할 있을 것인가?(16:14-18)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본문은 이해하기가 쉽지 아니한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하나님나라 복음과의 관계가 모순적인 이중관계로 기술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고 높은 평판을 탐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잘못에 대하여 먼저 질책하고 계십니다(16:14-15). 그런데 다음에는 천하보다 율법이 귀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16:17). 그렇다면, 율법은 하자가 없는데 그것을 해석하며 적용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뜻일까요?

만약 율법이 완전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구원을 받으면 터인데 예수님께서는 무엇때문에 세상에 오시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본문의 풀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 율법의 기능이 죄를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고 하는 설명을(3:20,  10:4) 깊이 음미해보아야 같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구절,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 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6:18) 명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바리새인들 좋아하는 자들이라.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16:14);

(1)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오경을 율법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오경이 결코 율법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략하게 살펴보더라도, 모세오경의 내용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첫째, 창세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믿음의 조상들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 과정 광야생활 그리고 시내 율법을 적고 있습니다. 셋째, 레위기는 속죄의 제사의 규정과 기타 율법사항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넷째,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조사 그리고 광야생활의 갈등과 해결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신명기는 요단 동편 땅의 점령 지도자의 교체 그리고 권의 경전을 한권으로 편집하고 부디 여호와를 올바르게 섬기라고 하는 모세의 마지막 당부를 싣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모세오경을 천편일률적으로 율법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편파적인 시각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신정국가의 법률로 보고서 세부적인 생활율법까지 제정하여 백성들에게 무조건 지키라고 강제하는 것은 지나친 종교 행위입니다. 그러한 폐단은 신정국가인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망한 후에도 선민사회에서 계속이 됩니다. 앞장을 서고 있는 자들이 소위 율법연구자이며 히브리정경에 대하여 주석을 만들고 생활지침을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3)   그들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면서 강조하고 있는 유대교의 사상이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민사상이고 하나는 현세축복사상입니다;

1)      선민사상이란 선민우월사상과 선민구원사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으로 선택 받은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생활을 하며 선민을 섬겨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      현세축복사상이란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것처럼 장차 세상의 모든 축복을 현세에서 누릴 있도록 주신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고 있는 이방인들은 저주를 받겠지만 선민들은 반대로 신명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현세적인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28:1-14).

(4)   그렇게 유대인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에는 현세적인 축복을 부귀영화로 누리고 있는 자들이 율법을 지키는 의인이며 형통한 자들입니다;

1)      그러한 의미에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고 있습니다(16:14a). 돈이 많아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얻었다고 하는 표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재물과 인생조차 주인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므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16:8-9). 예를 들면, 생계가 어려운 자들을 돌보아 주고 생존의 위기에 빠진 자들에게 재물을 기울여서 살려주라고 하십니다(25:34-46, 10:33-37).

3)      그러한 예수님의 주장은 바리새인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16:14b). 이유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여 저주를 받아 가난한 자로 그리고 소외된 자로 살고 있는 그들을 도와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 받는 것이니라”(16:15);

(1)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하는 것입니다(17:1, 삼상16:7).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생활을 마치 법률생활처럼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 잘못이 적발이 되지 아니하면 의인으로 간주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율법은 일종의 의무규정으로 사회적 종교적으로 강제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민의 행동이 율법의 규정에 위배가 되었을 때에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죄가 되고 선민들의 공동체에서 일종의 인민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거룩한 사귐과 교제라는 신앙의 차원이 타락하여 사회적인 책벌과 응징이라는 수단으로 백성들에게 율법준수를 강제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실질적으로 율법을 모두 준수하고자 하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을 원하고 있는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십계명 그리고 기타 율법의 정신을 구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자면 평생을 하나님말씀의 종으로써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그와 같은 내면적인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입니다.

(3)   하나님께서 보시는 그들의 마음중심에는 이기적인 탐욕과 축복사상이 그득합니다. 그러나 회칠을 바깥은 백성들이 보기에 거룩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모순과 이중성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준엄하게 외식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질책을 하십니다(23:13-29, 12:42-46). 점을 본문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 받는 것이니라”(16:15).

셋째로,율법 선지자 요한의 때까지, 후부터 하나님나라의 복음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16);

(1)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님의 신앙행태는 상당히 다릅니다. 차이는 마치 선민들의 메시아 사상과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 사상과의 차이와 같습니다;

1)      선민들은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원하고 있습니다.

2)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시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9:6-7, 11:4-5). 메시아는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불러모아 하나님의 공의와 영생을 함께 누릴 있도록 하는 여호와의 깃발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11:10-12).

(2)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대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길을 세례 요한이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는 용감하게도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잘못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고 나섭니다. 이복동생의 아내를 자신의 처로 삼은 것은 윤리적으로 그리고 율법적으로 용서할 없는 만행이라고 규탄합니다(14:3-4, 18:16). 그것을 보고서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체포하여 구금하고 맙니다. 갈릴리의 감옥에서 세례 요한은 메시아로 불리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외세를 물리치고 자신을 감옥에서 구해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11:2-15). 하지만 그의 기대는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그만 참수를 당하고 맙니다(14:8-11).

(3)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기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만족시켜주지 아니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가지로 짐작이 됩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인 로마의 군대와 헤롯 왕가를 모두 물리치고 선민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제국을 회복시켜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신앙적인 문제가 전혀 해결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교만한 유대인들이 로마인을 대신하여 이웃나라들을 압제하는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 그러므로 근본적인 변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용서하고 함께 영생을 얻는 마음으로 변화시켜야만 합니다(5:43-48). 압제를 당하는 자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구원해 주어야만 합니다. 결국, 선민구원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이 아니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깃발 아래 거듭난 인생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사상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나라로 함께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나라가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1)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선민 유대인들이 원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길로 예수님을 선도하겠다고 과감하게 자신을 헤롯 안디바의 감옥으로 던진 선지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선민사상을 떨쳐버리지 못한 신앙생활의 결과입니다.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청종했더라면 그러한 선택을 해서는 안됩니다.

2)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외세를 물리치는 군사력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영생구원의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적인 능력으로 사용해야만 합니다(26:52). 그러한 입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선민사상과 율법주의는 세례 요한의 때까지이며 그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외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6:16).

넷째로,그러나 율법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16:17);

(1)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래 정신이란 바리새인들이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해석이나 적용의 내용과 다르다고 주장하십니다. 율법의 기본정신은 하나님사랑이며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12:30-31). 그런데 어떻게 선민만이 우월하며 구원의 대상이고 이방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저주로 멸망을 당한다는 가설이 성립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현세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세상적인 축복만을 주시는데 그치시겠습니까?

(2)   마디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이기적인 선민사상으로 어그러뜨리고 있으며 영생구원의 하나님나라를 외면한채 다윗의 이스라엘 제국의 재건만을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깃들어 있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과 하나님사랑을 모두 헌신짝처럼 버리고서 신앙생활을 자기들 마음대로 영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뜻과 바리새인들의 삐뚤어진 율법생활을 분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말씀의 본래 뜻에 충실한 율법이란 온전한 것인데 단지 그것을 이기적인 현세주의로만 해석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명제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16:17).

다섯째로,무릇 자기 아내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 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6:18);

(1)   결혼생활이란 권리와 의무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권리와 의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십니다(19:5). 그것은 선민이라는 권리의 부여입니다. 그러므로 자리에서 선민의 권리에 따르는 선민의 의무가 다음과 같이 동시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말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할지니라”(19:6).

(2)   그런데 선민들이 이기적인 선민우월사상과 선민구원사상 그리고 현세적인 축복사상만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의 권리만을 향유하겠다고 하는 태도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민의 의무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의 직무와 중보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백성의 신앙생활을 전부 버려버리고 일체 행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현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우상문화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신앙생활의 문제점을 예수님께서 절묘하게 표현하고 계십니다; “무릇 자기 아내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간음함이요”(16:18a). 남편의 의무를 행하지 아니하고 아내를 버려버립니다. 그리고 우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아내를 얻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입니다.

(3)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여버립니다. 결과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40년이 못되어 로마군대의 진격으로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바리새인들의 이기적인 선민사상과 외식적인 신앙생활 그리고 현세적인 축복사상이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물질을 숭상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버린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현세축복사상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세태를 예수님께서 2,000 전에 벌써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무릇 버림 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6:18).

결론적으로, 이상과 같은 해석은 사도 바울의 말씀풀이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서 기본정신을 무시한 일종의 신정국가의 법률체계로 삼아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선민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율법의 기본정신에 충실할 때에 율법은 존귀한 것이며 천하보다 귀중한 창조주의 말씀의 일환이라고 정의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기적으로 그리고 현세적인 축복사상으로 이해하며 적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황금만능사상과 더불어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하나님사랑으로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본뜻을 올바르게 구현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