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60강(눅15:25-3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3. 03:28

누가복음 강해 160(15:25-3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11()

 

첫째아들이 범하고 있는 가지의 잘못에 대하여(15:25-32)

 

맏아들은 차남의 요청을 들어준 아버지의 분배에 따라 동생과 함께 이미 재산을 받아서 챙긴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5:12). 그런데 그는 이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구실로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15:31).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자신의 차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라진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15:17-20). 이미 아버지의 재산을 얻어서 분가를 동생이므로 그가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서 어떠한 기업이나 분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지금 돌아온 탕자를 정식으로 다시 아들로 맞아 들이고 그것을 환영하는 동네잔치를 벌이고 계십니다(15:23-24).  

사실을 알게 장남은 도무지 아버지의 처사가 못마땅하고 화가 납니다(15:25-28).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는 조그만 잔치를 열어준 적이 없으신 부친이 탕자를 환영하는 잔치를 크게 열어주고 있으니 그것은 심히 불공평한 처사라고 아버지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15:29-30).

그러한 주장의 내면에는 옛날 유다의 차남인 오난의 삐뚤어진 마음이 담겨있는 것만 같습니다. 훗날 자신의 상속재산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서 죽은 형의 아들을 대신 만들어주지 아니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 오난입니다(38:8-9). 과부가 형수 다말에게 길을 열어주지 아니하고 있는 악한 마음씨를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리에서 오난을 죽여 버리십니다(38:10).

그러한 오난의 이기적이며 아버지의 것을 독식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본문 탕자의 비유 가운데 장남에게서 발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디로, 선민 이스라엘의 잘못된 하나님신앙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맏아들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은대”(15:25-26);

(1)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있는 맏아들의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맏아들은 밭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이제 귀가(歸家, 집으로 돌아옴) 하고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왔을 때에 평소와는 다른 잔치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잔치를 하게 되면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주인과 손님들이 함께 어울려서 연회를 즐기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잔치를 벌이고 있는 집의 소리가 하도 떠들썩하여 근처에서 금방 수가 있습니다. 소리가 엄청 요란하므로 가까이 도착한 맏아들이 듣게 것입니다.

(2)   맏아들은 아침에 밭에 일하러 나갔을 때만 하더라도 잔치이야기가 전혀 없었는데 난데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부름을 하고 있는 종을 불러서 진상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있는 사실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차남이 아버님 살아 생전에 미리 상속을 받게 되었을 때에 장남 역시 아버지의 재산을 상당히 물려받았습니다(15:12).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온종일 밭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농사를 돌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그가 아버지께서 스스로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차남을 위하여 환영잔치를 열어주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만약 사전상속을 받은 장자가 아버지의 것을 아버지가 사용하시는 것에 대하여 혹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평한다고 하면 그것은 전형적인 월권이며 불효자의 모습입니다.

2)      둘째, 장남과 함께 살면서 아버지가 아들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독단적으로 크게 동네잔치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재산이 아버지 소유이며 집안에서 아버지가 족장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장남은 아버지께서 엄청난 잘못을 범하지 아니하는 이상 결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15:27-28);

(1)   종의 답변은 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서 거지꼴로 아버지 집을 찾아온 차남을 환영하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갑자기 동네잔치를 크게 열고 있다는 것입니다(15:27). 답변을 듣고서 장남은 속이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잔치자리에 아예 들어가고자 하지를 않습니다(15:28a).

(2)   종으로부터 아들이 불만이 가득하여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아버지는 이제 차남이 아니라 장남을 맞이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고 있습니다. 차남의 경우에는 아버지 앞에 고개를 들지를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장남의 경우에는 전혀 다릅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으므로 아버지의 처사가 심히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장남이 문제거리입니다. 그를 설득해야만 합니다(15:28b); “어떻게 장남의 생각을 돌릴 수가 있을까요? 그에게 어떻게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해줄 수가 있을까요?”.

셋째로,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15:29-30);

(1)   그는 평소 아버지가 장남인 자신을 위하지 아니하고 섭섭하게 대접하고 있다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평하기를 그는 여러 동안 연로하신 아버지를 섬겨온 효자라는 것입니다(15:29a). 그런데 그렇게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효자인 자신에게 대하여 어떻게 그동안 벗들과 함께 즐길 있도록 작은 잔치라도 한번 열어주지 아니하셨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15:29b).

(2)   장남은 자신의 말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예를 들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바로 다른 나라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차남을 다시 아들로 맞아들이고 그를 위하여 동네잔치를 열어주고 있는 아버지의 불공평한 처사라는 것입니다(15:30). 언뜻 들어보면, 장남의 비판에 별로 하자가 있는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면 엄청난 죄악이 속에서 다음과 같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1)      첫째,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전제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것이 당연히 장남의 것이 되는 것일까요? 차남이 아버지의 재산을 얼마간 사전상속을 받아서 외국으로 떠나버렸다고 하여 이제 부친의 집에 살고 있는 장남이 당연히 모든 재산을 차지하게 되는 것인가요? 그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 계시며 재산에 대한 소유권과 처분권을 행사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남에 해당하는 선민들이라고 하여 창조주 여호와의 소유권과 처분권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것인 사고(思考, 생각)하거나 선전해서는 절대로 아니되는 것입니다.

2)      둘째, 아버지를 섬기고 명령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장남이 사실은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 아버지의 생각을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 10손가락을 깨물어서 아프지 아니한 손가락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난 아들보다는 못난 아들에게 부모의 마음이 쓰인다고 합니다. 이유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유기적인 혈연관계가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내리사랑이듯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여러 동안 모시며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장남이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장남은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아들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살면서 장자로서의 권리를 온전히 누리는 그것이 그의 존재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성전에 계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만을 위하신다고 사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생각과 닮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15:31-32);

(1)   아버지의 설득은 절반은 장남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다릅니다. 먼저 아버지의 생각이 장남의 생각과 같은 점은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15:31)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으므로 아버지의 것이 장남의 것이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함께하였더라면 천국은 그들이 것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적으로 할례를 받고 속죄를 위한 성전제사를 드리며 율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모양새를 갖추고는 있지만 속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29:13),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11:39).

(2)   장남이 모르고 있으므로 그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15:32);

1)      첫째, 세상나라를 동경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나간 아들이 회개를 하고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15:20).

2)      둘째, 아버지의 목적은 차남이 탕진한 재산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은 창조주의 권능으로 얼마든지 창조할 수가 있지만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의 마음은 쉽게 창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기까지 하십니다.

3)      셋째, 아버지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집을 나간 아들이 영원히 아버지의 집을 찾아오지를 못하고 운명을 맞이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죽을 운명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차남이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와 주었으니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이 기쁜지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만약 그와 같은 아버지의 자식사랑을 장남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생을 사랑하는 이른바 이웃사랑의 모습을 진작에 보여주었을 것입니다(12:30-31).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장자인 선민 이스라엘의 경우에는(4:22) 그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역사 가운데 전혀 그러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서 부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이방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