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59강(눅15:21-2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2. 00:59

누가복음 강해 159(15:21-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10()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용서하고 기쁘게 아들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15:21-24)

 

본문은 아버지의 생각과 둘째아들의 생각과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점을 탕자의 비유를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둘째아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세상나라를 동경하여 그곳으로 가서 한번 즐겁게 살아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재물이 필요합니다.

2)      둘째, 재물을 아버지에게서 얻고자 합니다. 아버지 사후에 유산으로 받도록 되어 있는 자신의 상속분을 미리 얻어서 다른 나라로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3)      셋째, 둘째아들은 단지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고 있습니다. 아버지보다는 재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4)      넷째, 차남은 아버지로부터 재물을 얻어서 이웃나라로 가서 소원성취를 하고 있습니다. 결과 세상도시의 유흥과 향락에 빠져서 그만 재물을 전부 낭비하고 맙니다.

5)      다섯째, 탕자는 도시에서 취직을 능력이 없어서 들판에서 돼지를 치는 인부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흉년이 들자 굶주리게 됩니다. 그때서야 풍족한 아버지의 생각이 납니다.

6)      여섯째,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았음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굶어 죽기 전에 아버지 집으로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7)      일곱째, 재산상속만 바라고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온 자신입니다. 따라서 죄송함 때문에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사용해 달라고 요청을 하고자 합니다(15:19).  실제로 아버지를 만난 탕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15:21). 그것이 집으로 돌아온 차남의 모습입니다.  

(2)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다릅니다;

1)      첫째, 자신이 죽지도 아니했는데 둘째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보다는 재산상속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섭섭합니다.

2)      둘째, 잘못 생각하고 있는 차남을 혼을 내려고 하다가 그만 둡니다.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재발을 방지할 있는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3)      셋째, 방법이 바로 재산을 떼주어서 소원대로 세상으로 나아가서 마음대로 한번 살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4)      넷째, 아니나다를까 차남은 이웃나라로 가서 세상적인 유흥과 향락을 즐기다가 재물을 모두 탕진하고 맙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돼지를 치면서 연명을 하고 있습니다.

5)      다섯째, 나라에 흉년이 들자 굶주리게 됩니다. 그때서야 살길을 찾아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탕자는 후회막급입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으며 받은 재산마저 탕진한 처지인지라 차마 아들로 다시 받아들여 달라고 하는 염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품꾼으로라도 일할 있도록 부디 자신을 받아 달라고 사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5:21).

6)      여섯째, 모습을 보고서 아버지는 흔쾌하게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입니다(15:22-23). 이유는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 나간 아들이 세상살이 가운데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고서 살길을 찾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신 아버지이십니다”(15:24a 의역).

7)      요컨대, 이제 다시는 차남이 이웃나라로 가서 세상의 낙을 즐기겠다고 인생과 재물을 낭비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재산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관리하게 되는 신실한 아들이 것입니다(15:24b).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15:21);

(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5:21a);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자의 관계는 천륜(天倫)으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아들은 자신이 천륜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아버지께 동시에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그는 이웃나라에 가서 세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려보기 위하여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것도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사전에 상속분을 챙겨서 떠난 것입니다.

2)      둘째, 그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재물을 아버지보다 소중하게 생각한 처사입니다.

3)      셋째, 아버지를 떠남으로써 자식의 도리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로 가서 마음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아예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2)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15:21b);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가 아들입니다. 그런데 탕자는 그러하지를 아니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마음대로 살기를 원한 자입니다. 더구나 아버지의 재물을 얻어 타국에 가서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1)      재물을 사용하고 있을 때에는 아버지를 찾아볼 생각을 전혀 하지를 아니했습니다. 이제 살길이 막막해지자 아버지의 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탕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진실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을 이미 상실한 것입니다.

2)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탕자가 아들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아버지께 솔직하게 말씀 올리고 있는 대목입니다(15:21b). 그러나 말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둘째로,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15:22);

(1)   신분을 상징하고 있는 고대사회의 가지 신물(信物)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의복입니다. 둘째, 가락지입니다. 셋째, 신발입니다(15:22);

1)      고대사회에서는 왕의 옷과 신하의 옷이 다릅니다. 옷의 디자인도 다르지만 우선 색깔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왕이나 왕족들은 염료 값이 비싼 자주색의 옷을 입습니다(16:19, 16:14). 그리고 신하들도 계급에 따라서 색깔이 다릅니다. 주로 붉은 , 푸른색, 녹색 등의 순서가 되고 있습니다.

2)      왕의 가락지에는 직인(職印)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장(印章, 도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그에게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자신의 가락지를 빼어서 주고 있습니다(41:42).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황제가 처음에는 재상인 하만에게(3:10), 나중에는 중신(重臣) 모르드개에게 역시 자신의 반지를 맡기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8:2).

3)      고대사회에서는 신발의 값이 비쌉니다. 따라서 어떤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고 있는가 하는 것이 신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아버지가 탕자에게 아들의 신분에 맞는 신발을 신겨주고 있는 것입니다(15:22).

(2)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여 집으로 돌아온 탕자에게 아들의 신분에 어울리는 의복과 가락지와 신발을 가져다 주라고 합니다;

1)      말은 탕자의 신분을 본래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아들을 역시 상전으로 섬기라고 하는 표시입니다. 아버지가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이유는 마디로,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온 탕자는 다시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가출을 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나라의 유흥과 환락을 동경하여 재물을 가지고 집을 나서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세겜 성에서 말년을 즐기려고 했던 야곱이 회개를 하고서 벧엘의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33:18-20, 34:30, 35:1-15).

셋째로,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15:23);

(1)   고대사회에서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서 고기로 사람을 대접한다고 하는 것은 최상의 대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15:23a). 예를 들면, 헤브론 마므레 수풀에 있는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오고 계시는 여호와와 천사를 아브라함이 융숭하게 대접한 경우가 그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축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18:7-8).

(2)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얻은 기쁨을 혼자서만 맛보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친지와 종들과 함께 즐기고자 합니다(15:23b). 그것은 첫째, 아버지의 기쁨이 엄청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완전히 용서하고 다시 아들로서 신원회복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널리 공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넷째로,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 통하여 회개의 필요성과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디로, 천국잔치를 크게 베푸시면서 탕자를 아들로 맞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15:23, 24b). 그리고 자리에서 그렇게 기뻐하시는지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15:24a).

(1)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는 가운데에는 가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타국에서 세상의 유흥과 환락에 파묻혀서 평생을 지내게 되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과감하게 세상나라를 떠나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고자 것이 다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2)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하는 말은 아버지가 둘째아들의 소원을 어떠한 심정으로 들어주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아버지를 떠나서 이웃나라에 재산을 가지고 가서 펑펑 쓰면서 즐기게 되면 쾌락이 엄청날 것으로 차남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일 세상나라를 동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들의 생각을 바로잡아줄 수가 있을까요? 방법은 아들의 소원을 한번 들어주는 것입니다. 직접 체험을 해보지 아니하게 되면 계속 세상의 즐거움이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게 것입니다.

2)      그렇지만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 방법인지 모릅니다. 만약 차남이 세상나라로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게 되면 완전히 아들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잘못을 확실하게 깨닫고 돌아오게 된다면 그것은 훌륭한 아들을 하나 얻는 셈이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탕자의 비유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재물을 자신의 소유인줄 잘못 알고서 세상나라에서 함부로 낭비하고 탕진해버리고 있는 탕자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모두 탕진한 아들이 세상에서 먹고 방도가 없어서 회개를 하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 오고 있습니다. 부디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라도 자신을 사용하시고 먹고 방도를 마련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를 환영하고 신원회복을 해주십니다. 더구나 천국에서 잔치를 열어 주십니다. 이유가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15:24)이라는 것입니다.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 아버지의 것을 자신의 것인 알고서 세상에서 함부로 낭비하고 있는 자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둘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다시 얻은 아들입니다. 셋째,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둘째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유턴’(U turn)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15:24). 그러므로 아무쪼록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즉시 아버지에게로 유턴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