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65강(눅16:26-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15. 23:46

누가복음 강해 165(16:26-3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16(주일)

 

내세와 현세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철칙과 사람이 인생 가운데 구원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하여(16:26-31)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16:19-31)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이유는 이미 전번 강해에서 살펴본 그대로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거지 나사로의 삶이 사실은 여호와의 종의 모습 닮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있는 부자의 삶이란 최후가 실로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의 존재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고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 선민의 의무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를 않고 끝까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맙니다. 결과가 음부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고통 가운데서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4절과 오늘의 본문의 말씀에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가지의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1)   첫째, 음부의 불꽃이 너무 뜨거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므로 부디 나사로를 자신에게 보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때에 손으로 물을 찍어와서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적셔주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하는 소원입니다(16:24). 그러나 아브라함에 의하여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음부의 세계와 천국의 세계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텅이가 있어서 왕래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16:26).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상 변개(變改, 변경과 개조)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16:25).

(2)   둘째, 부자는 현세에서 아직 살고 있는 그의 5형제들이 음부의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브라함에게 말하고 있습니다(16:28). 그러므로 부디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어 형제들에게 살아 생전에 회개를 하도록 말해달라는 것입니다(16:27-28). 나사로가 내세에서 현세로 가서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면 그의 5형제들이 전부 회개를 것으로 부자가 확신하고 있습니다(16:30). 그러나 아브라함의 답변은 다릅니다. 그렇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16:29, 31).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답을 찾아보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16:26);

(1)   본문의 바로 절의 내용은 현세와 내세를 전부 합하여 온전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것입니다(16:25). 그러므로 현세에만 인과응보의 법칙이 지배하며 모든 보상이 세상에서 이루어진다고 전제하고 있는 현세주의는 잘못된 관념이라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특히 율법을 지켜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 받으라고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세에서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교통이 두절이 되어 있습니다(16:26b). 하나님께서 서로 왕래를 수가 없도록 구렁텅이를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16:26a);

1)      그와 같은 완벽한 분리조치를 하신 이유는 최종적인 심판의 결과 천국의 영생이냐? 아니면 지옥의 영벌이냐? 완전한 분류가 이미 끝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른쪽으로 분류가 의인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맛보게 됩니다(25:34, 16:22). 반면에, 왼쪽으로 분류가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길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15:41, 16:23).

2)      누구도 다시는 최종심판의 결과를 뒤집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집행과정에 있어서도 서로 왕래나 변경이 절대로 있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아브라함이 증거하고 있습니다(16:25-26). 그것이 예수님께서 비유의 이야기로 설명해주시고 있는 내세의 모습입니다.

둘째로,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형제 5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16:27-28);

(1)   부자의 생각에는 사실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서 형제들에게 지옥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부자인 자신이 지옥에서 불길 가운데 직접 뜨거운 맛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체험은 형제들에게 생생하게 전달이 것입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듣게 되는 그의 형제들이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여 살아가게 것입니다.

(2)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지옥에서는 현세로 다시 나갈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지옥의 영벌에 처해지게 되면 다시는 구원의 기회나 탈출의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부디 나사로라도 현세로 다시 보내어서 자기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16:27).

(3)   그러면 나사로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자의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전해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16:28a). 나사로가 자기의 눈으로 직접 있는 지옥의 형벌의 모습에 대하여 증거를 해주게 되면 부자의 형제들이 그러한 미래를 맞이하지 아니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새로운 삶을 선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6:28b).

(4)   참고로, 부자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아버지여 구하노니”(16:27)라면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부자의 바로 아버지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표현은 단지 조상님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이 고대사회에서는 조상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으므로 풀이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셋째로,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16:29);

(1)   그런데 아브라함의 대답이 부정적입니다. 그렇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은 천국에 와있는 나사로를 현세로 다시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현세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서 깨달음을 얻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16:29). 왜냐하면, 모세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세상섭리의 경륜에 대하여 증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모세오경과 선지서를 자세하게 읽고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성찰을 해야만 합니다. 결과 어떠한 삶의 방법을 선택할지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서 뜻을 인생가운데 실천하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한평생 원이 없이 살아볼 것인가?”. 물론 살아생전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또한 선택에 대해서는 끝까지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6:30-31);

(1)   아브라함의 답변에 대하여 부자는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16:30a).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지옥 불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고통에 대하여 누군가 현세로 가서 그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면 형제들이 틀림없이 모두 회개를 것만 같습니다(16:30b). 부자 자신은 이제 회개할 기회가 모두 사라져버렸지만 현세를 살고 있는 그의 5형제들을 그렇지가 않습니다.

(2)   부자의 생각으로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과 영적인 증언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자신의 경우에도 모세오경과 선지서를 전부 읽었지만 내세를 믿는 믿음을 결코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세에서 현세로 증인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없는데 어떻게 단지 선지자들이 영적으로 환상 가운데 것을 전해 듣고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3)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수가 없다고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16:31a). 이유는 현세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자들은 비록 내세에서 누군가 현세로 가서 자신의 눈으로 것을 전해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회개를 하거나 삶의 방법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6:31b). 어째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      물론 부자처럼 인생 끝에 하나님의 최종판결을 받고서 현재 음부의 세계에서 불길 가운데 엄청난 고통을 직접 당하고 있는 자들은 후회가 막심합니다. 자신이 현세에 살고 있는 인생 가운데 어째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했는지 원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따라서 진작에 그러한 미래를 알았더라면 현세에서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하지만 아직도 현세에서 살고 있는 그의 형제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미래의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현세를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적 여유가 있으며 내세에 대해서는 어떠한 결론도 서둘러서 내릴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단지 어떤 사람들의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서 확정적인 결론을 내린다고 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참고로,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다윗왕조의 미래에 대하여 여호와의 예언을 전해준 적이 있습니다(39:5-7). 당시 히스기야 왕이 영적인 자만에 빠져서 그만 멀리 바벨론에서 사자에게 자신이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쳤다고 자랑을 했습니다(39:1-2a). 또한 유다 왕국의 강성함을 자랑하기 위하여 무기고와 국고까지 모두 공개하여 보여주었습니다(39:2b). 결과 유다 왕국의 보물에 눈독을 들이게 바벨론에 의하여 훗날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39:4-6). 더구나 히스기야 왕의 자손들이 바벨론 왕의 환관이 되고 것이라는 비참한 미래지사입니다(39:7). 그러나 히스기야 왕이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 이유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국이 건재하며 개인적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가 있으니 그것이면 만족하다는 것입니다(39:8). 그것이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현세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신정국가의 왕의 신앙태도가 그러합니다.

결론적으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위탁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게 되면 그것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입니다(24:44).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예언을 듣고 마음속으로 구속자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인생 가운데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누군가가 내세에서 왔다고 하면서 미래의 지옥의 영벌과 천국의 영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고 한다면 마치 옛날 롯의 사위들처럼 사람들은 그냥 농담처럼 여기고 것입니다(19:14). 이유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미래지사에 대해서도 아직 시간적으로 경험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현세에서의 자신의 미래도 불투명하고 불확실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다음의 내세의 문제에 대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동양의 성인인 공자의 이야기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아직 현세의 미래지사도 모르고 있는 내가 어떻게 죽은 다음의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세를 모두 모르고 있는 저는 내세의 일에 대하여서는 더더구나 언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언급이 설득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과 구원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내릴 있는 영역에 속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계심을 인정하느냐? 아니하느냐? 깊은 경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조주가 계시기에 내가 정도로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감사의 깨달음으로 남은 인생을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