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55강(눅15: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9. 01:40

누가복음 강해 155(15: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6()

 

세리와 죄인들까지 구원해야만 하는 이유(15:1-7)

 

죄인과 회개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의사 누가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있어서 그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의 대표자로서 세리를 꼽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세리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국세(內國稅, inland revenue) 거두고 있는 일반세리가 아니고 관세를 거두어서 모두 로마황제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는 세관원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 땅에서 대표적인 소비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소용이 되는 많은 물품들을 이웃나라로부터 수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이웃나라에서 사들이고 있는 물품들에 대해서는 로마당국이 세관을 통과할 때에 엄청난 관세를 물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황제에게 바치기 위하여 고액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 예루살렘의 물가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제적 부담을 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로마당국에 대하여 호의적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힘이 약한 유대인들이 드러내놓고 로마의 황제를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만만한 유대인출신 세관원들을 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매국노이며 로마의 앞잡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세관원들을 대표적인 죄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5:30). 선민들은 세관원과 같은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처벌만이 있을 구원의 은혜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실제로 유대인들의 관념이 그러합니다.

그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인과 회개에 대한 예수님의 용어는 개념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의 개념과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양들은 죄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다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보호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멋대로 길을 가고 있으며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를 못하고 있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본문에서 죄인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길을 가다가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양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서 안전하게 우리 안으로 인도하여 보호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심정이 바로 목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3)   셋째, 마음을 깨닫고서 자신을 찾아오는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서 인생길을 가겠다고 자신의 결심을 밝히는 것이 이른바 회개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사람(나사렛 예수)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5:1-2);

(1)   세리와 죄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의미는 유대교리를 율법화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의인들이며 반면에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의미는 죄인들 가운데 세리가 대표적이며 바리새인 가운데 서기관들이 대표적이라는 것입니다;

1)      죄인과 의인의 구분은 본래 여호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에 따라서 의인과 죄인의 구분이 이루어집니다. 구체적으로, 주인의 뜻대로 실천한 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자신의 오른쪽에 세우십니다(25:33-34). 그러하지 아니한 자는 불의한 종으로서 왼쪽에 세워지고 맙니다(25:41-43). 결과 오른쪽에는 영생이, 왼쪽에는 영벌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25:46).

2)      그런데 구분을 선민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선민사상을 지탱하고 있는 유대교의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해석하고 유대교리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생도의 시절을 거쳐서 랍비가 되고 나중에는 소수가 산헤드린 공회로 진출하여 율법학자로 불리게 됩니다. 랍비들의 스승인 그들은 옛날 유다 왕국시대의 관직명을 원용하여 서기관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3)      그들 서기관들이 바리새인들의 리더이며 바리새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랍비들의 스승들이 유권해석권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교입니다. 따라서 죄인과 의인의 구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서기관들과 랍비들 그리고 생도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 바리새인들이 단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할까요? 이제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됩니다.

4)      이스라엘 자손들의 유대교는 선민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선민들의 민족적인 집단이기주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선민들의 민족적인 이익을 해치고 있는 자들은 종교적으로도 정죄가 되며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대표자가 바로 유대인출신 세관원들입니다(5:27, 19:2). 세관원들은 유대인들의 돈을 거두어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민족 반역자이며 로마제국의 앞잡이라고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대교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죄인들입니다.

(2)   유대교지도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유대인 회중에서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는 만나지도 아니하고 식사도 같이 하지를 않습니다(5:30, 4:9). 종교적으로 일종의 부정한 자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43:32). 그런데 선지자로 보이는 예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세리와 죄인들을 분리시키거나 쫓아내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집회장소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많이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3)   특히 세관원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장면을 보게 되면 레위의 초청으로 예수님 일행이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함께하십니다(5:27-29a).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게 것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그래서 마치 옛날 선지자 엘리야의 생도로 따라 나서는 엘리사처럼(왕상19:21) 잔치를 베풀고 동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5:29b). 그것을 보고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5:30). 일은 갈릴리 지역의 대도시인 가버나움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유대 땅에 들어오셔서 복음사역을 하시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같은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5:2).

둘째로,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100마리가 있는데 중의 하나를 잃으면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15:3-4);

(1)   유대교의 율법선생이 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은 의인이며 세리들은 죄인이라고 하는 수군거림을 예수님께서 듣고 계십니다(15:3). 참으로 이기적이고 세속적이며 단순한 이분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아전인수(我田引水, 논에만 물을 대고자 하는 )격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죄인이 누구이며 회개가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비유로써 말씀해 주십니다(15:3).

(2)   양과 염소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은 방목지에서 무리가 함께 잠을 잡니다. 하지만 염소는 반드시 우리에 넣어서 잠을 재웁니다. 이유는 양은 목자가 자신들을 지키고 있으면 범위 안에서 무리들과 함께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가 있는 가축입니다. 반면에 염소는 주인과 상관없이 자기 우리와 터전만 있으면 잠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개와 고양이의 차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흔히 개는 사람을 따르고 고양이는 터전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사를 때에 개는 주인을 따라 함께 이사를 가지만 고양이는 주인을 벗어 나서 옛집과 터전에 그냥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따라 이사를 주인이 나중에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기 위하여 전단을 돌리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며 편히 잠을 이루고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마치 염소처럼 어떤 양은 목자를 떠나 제멋대로 들판을 헤매고 다닙니다. 그래서 하루의 일과를 끝낸 목자가 양의 무리 곁에서 쉬어야 하는데 그러하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보호 하에 무리를 지어서 쉬고 있는 양들을 동료에게 잠시 맡겨 두고서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들판을 헤매게 됩니다(15:4). 빨리 발견하지를 못하게 되면 광야를 헤매다가 맹수에게 먹이감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인이 맡긴 양을 신실하게 돌보고 있는 목자는 반드시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잠을 설치면서 들판과 광야를 수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의 뜻이 무엇일까요?

1)      첫째, 피조물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계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제멋대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고서 죄인에게 멸망을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2)      둘째, 생명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인을 떠나 제멋대로 광야에서 위험한 가운데 헤매고 있는 양을 구원하는데 성도들이 동참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민사상에 빠져서 이방인과 죄인을 구원하지 아니하고 있는 선민들이 오히려 죄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3)      셋째, 창조주의 입장을 감안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선민들과 성도들은 이기적이고도 자의적인 해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독선적으로 단정하지를 말라는 경고가 속에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찾아낸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 내었노라 하리라”(15:5-6);

(1)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가 천국의 잔치자리와 어떻게 연결이 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을 떠나 제멋대로 방황하고 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로 인도하게 되면 천국에서는 잔치가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창조주 하나님의 기쁨이 크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선민은 비유 속의 목자와 같습니다. 이방인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15:5). 결과 그들을 회개시켜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게 되면 선민들은 천국의 잔치자리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것입니다(15:6). 

넷째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없는 의인 99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

(1)   선지자 요나는 변방지역 갈릴리 가드헤벨 출신입니다(왕하14:25). 그렇지만 역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니느웨 도시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때에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1:1-3). 앗수르 왕국의 수도인 그곳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생각으로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죄인들인 이방인들은 제멋대로 살다가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게 되면 그만입니다(4:1-5). 그런데 길을 걸어가서 그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까?

(2)   그러나 그것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아주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하나님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불과합니다.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만 사랑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4:9-11).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어긋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해석은 선민들에게 이방인들을 죄인의 길에서 떠나도록 하나님말씀을 전하게 하는 사명을 맡기고 있다는 것입니다(19:5-6). 그에 따라 선민들이 죄인과 이방인을 사람이라도 구원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게 되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기쁨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없는 의인 99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 하나님의 표적을 구하고 있는 선민들에게 주시고 있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결론적으로, 일찍이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다고 예수님께서 증언을 하십니다(11:29-32). 사명을 스스로 감당하는 자들이 선민이며 의인들입니다.

따라서 제멋대로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의인이며 이방인들은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세관원들을 미워하여 죄인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판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선민들에게 하나님말씀의 올바른 뜻을 제대로 전해야만 합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선민들부터 여호와의 만민구원의 뜻을 깨닫고 이방인들과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에 함께 입성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잔치를 베풀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아무쪼록 잔치자리에 떳떳하게 그리고 기쁘게 참여하시는 성도님들의 인생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