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51강(눅14:21-2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5. 21:25

누가복음 강해 151(14:21-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2(주일)

 

먼저 초청하였던 자들 대신에 천국잔치에 초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14:21-24)

 

예수님의 비유가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임금이 잔치자리를 마련하고 손님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손님들이 담합을 하여 보이콧을 합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자신들이 모두 참석하지 아니하게 되면 잔치는 성사가 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입장이 곤란하게 임금은 왕국의 유력인사인 자신들을 찾아와서 고개를 숙이고 부디 참석들을 달라고 부탁을 하게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왕국은 권신(權臣, 권세를 가진 신하)들인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져 나갈 것입니다. 요컨대, 나라에서는 왕국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유력한 권력자들인 자신들이 없으면 임금도 수가 없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민들의 종교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수고가 없으면 히브리경전을 공부하고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킬 있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외교적인 노력이 없으면 강력한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자치권을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인 유대교인들이 섬기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자신들을 무시하고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속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 선민들에게 기생하고 있는 우상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에 있다고 부르짖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정신나간 선지자로 치부하고서 아예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유대백성들이 상당히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 일행과 백성들을 이간질하고 분리시킬 수가 있을 것인가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한 유대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요지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므로 오만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생각을 뛰어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잔치자리에 그들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면 초청대상을 직접 바꾸실 것이라는 통보입니다. 우선 선민 유대인들 가운데 사회적으로 소외가 되고 인간대접을 받고 있는 자들을 초청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과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다리를) 저는 자들”(14:21)입니다.

그렇게 소외된 선민들로서 자리를 채워보지만 여전히 자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초청대상의 폭을 완전히 넓혀 버리십니다. 이방인들까지 초청을 하시는 것입니다(14:23). 끝으로, 주인이 종들에게 엄명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창조주이심을 모르고 감히 무시하면서 자기들끼리 담합하여 여호와 하나님까지 자기들 뜻대로 아예 좌지우지하려고 획책한 고약한 유대교지도자들은 앞으로 그들이 철저하게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상 다시는 천국잔치에 초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4:24 의역).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 불편한 자들 맹인들 (다리를) 저는 자들 데려오라 하니라”(14:21);

(1)   초청을 받은 인사들이 담합하여 임금의 초청에 모두 핑계를 대고서 불참하기로 했습니다(14:18-20). 이유는 임금의 뜻이 자기들의 이익과 어긋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위 임금 길들이기 나선 것입니다. 앞으로 자신들 신하들의 정책이 결정이 되면 임금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는 일종의 시위입니다. 그것은 마디로, 왕권주의가 아니라 신권(神權)주의를 내세운 반란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들의 의사를 종이 주인이신 임금에게 그대로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14:21a).

(2)   그런데 임금이 결코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크게 진노하십니다(14:21b). 이유는 보통 임금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창조주께서는 자신의 뜻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있는 민족을 말살하시고 새로운 가문을 하나의 민족으로 번성시켜 다시 자신의 선민으로 삼으실 있는 창조의 능력과 역사섭리의 능력을 동시에 보유하고 계십니다.

(3)   역사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차례나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 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나라가 되게 하리라”(32:9-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14:11-12).

(4)   따라서 이번에는 모세의 가문이 아니라 선민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모두 초청하여 천국의 잔치자리를 채우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 불편한 자들 맹인들 (다리를) 저는 자들 데려오라 하니라”(14:21c). 여기서 새로이 초청이 되고 있는 사람들은 선민사회에서 빈곤층이며 소외된 계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부자 친지를 초청하는 것보다 그러한 소외된 자들을 초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울린다고 하는 말씀을 진작에 하신 바가 있습니다(14:13-14).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가 시내의 거리와 골목”(14:21c)이라고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14:22-23);

(1)   아버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하나님나라는 참으로 넓은 곳입니다. 수도가 되고 있는 새로운 예루살렘 성의 규모만 하더라도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 따르게 되면 어마어마합니다; “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 지라. 갈대자로 성을 측량하니 12,000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21:16). 1스다디온을 185m 보고서 계산을 해보면, 예루살렘 성의 길이는 면이 12,000스다디온이므로 2,220km입니다. 그러므로 정방형의 면적은 492 km2입니다. 요컨대, 하나님나라의 수도가 되고 있는 예루살렘 성의 넓이는 규모가 중국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이라고 하겠습니다.

(2)   애초에 천국은 잔치자리에 선민들을 모두 초청하고도 남는 넓은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선민 가운데 소외된 자들을 초청하여 자리를 채워보아야 좌석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자리가 차야 잔치를 시작할 수가 있는데 걱정입니다. 그래서 종이 주인에게 아직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다고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14:22). 주인께서는 과연 어떻게 조치하실까요? 처음부터 예루살렘 성을 크게 설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본심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14:23). 여기서 길과 울타리 나가서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하는 명령은 선민의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서 이방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만민구원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셋째로,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사람들은 하나도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4:24);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선민의 의무사항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민들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19:6).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선민들은 세상에 하나님말씀을 전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산으로 데리고 와서 예물로 드려야만 합니다(66:20-21). 그렇게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선민들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옛날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18:23-32, 19:6).

(2)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이라고 자랑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안전과 번영을 책임져 주십니다. 또한 세상에 제일의 민족이며 구원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분히 선민우월사상이며 선민만의 구원사상입니다. 그렇게 선민의 권리를 자랑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의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이행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선민만의 현세적인 구원을 간구하면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천국잔치자리의 초청까지 집단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저의(底意)라고 하겠습니다.

(3)   그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만민구원이며 영생구원이라는 예수님의 외침이 듣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신앙생태를 보이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사람들은 하나도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4:24).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유대교인들은 초청대상에서 이제는 제외가 되고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를 듣게 되는 때가 바로 유대교지도자들이 크게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만 하는 시점입니다.

결론적으로,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점심식사에 초청한 바리새인 지도자와 자리에 함께한 바리새인들과 유지들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서도 전혀 회개를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義人)사상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선민으로서 율법생활을 하고 있으며 성전제사도 빠짐없이 지내고 있으므로 자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는 믿음이 확고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그렇게 혈통적인 선민사상, 육신적인 할례, 남의 눈만 의식하는 율법생활, 매년 되풀이 되는 속죄일의 제사만 가지고서는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1:12-13). 왜냐하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삶의 모범을 예수님께서 눈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천국잔치에 들어갈 있는 자격에 대하여 쉽게 설명해주시고 있는데 그것을 아예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만 그러한 것일까요? 오늘날에도 육신적인 선민사상에 젖어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다시 함정에 빠지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눈을 의식하면서 앞에서 신앙생활을 똑바로 해야만 합니다(17:1).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성도의 삶의 모범을 보여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은혜가 여러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