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50강(눅14:15-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5. 21:24

누가복음 강해 150(14:15-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0 1()

 

세상잔치와 천국잔치와의 차이점에 대하여(14:15-20)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유대 어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청을 받아 함께 떡을 떼고 있습니다(14:1).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을 의사 누가가 14 1-24절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나라의 보상보다는 땅에서 자기들끼리 종교적인 기득권을 누리면서 서로 대접을 받고 대접하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비판하십니다(14:12).

근본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보상을 얻고자 한다면 땅에서 반대급부를 수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돌보아 주어야만 합니다(14:13-14). 예를 들면 질병과 장애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때로 생존의 위기 가운데 헤매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그들을 돌보고 살려 주어야만 합니다(3:4). 그것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엿볼 있는 좋은 이웃입니다(10:33-37).

그런데 율법을 연구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그들에게 인간대접을 해주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 지도자가 그러한 자들을 안식일날 함께 떡을 떼는 자리에 있어서 아예 초청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수종병자 사람을 초청하여 말석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의 맞은편에서 함께 떡을 떼어서 먹도록 의도적으로 배치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14:2).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신앙적인 문제점을 통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식사자리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내용이 날카롭고 통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적이 하나같이 바리새인들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생활의 문제점을 갈파한 것이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이 사람 본문에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14:15).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전혀 알아 듣고 있는 참으로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잔치자리에 대하여 언급을 하시자 자신도 그곳에 참석하여 떡을 떼는 복을 누리고 싶다고 무척이나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깨우침을 주고자 하십니다. 방법이 쉽게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잔치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더니”(14:15-16);

(1)   여기서,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말을 듣고 이르되”(14:15a)라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시고 있을 때의 일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대 땅에서 어느 바리새인 지도자가 안식일에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을 했습니다(14:1). 이제 회당예배를 마쳤으므로 자기 집에서 떡을 떼면서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지도자는 아무래도 지역의 회당장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평소 안식일 회당예배가 끝나면 마을의 바리새인들과 유지들이 집에 모여서 함께 떡을 떼면서 오찬을 나눈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런데 식사자리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정중하게 모신 것이 아니며 더구나 일종의 시험을 하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동네의 유지들이 상석과 높은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말석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저 고맙게 말석에 앉아서 떡이나 먹으라고 하는 모양새입니다. 게다가 맞은편에 수종병이 환자를 배치하고 있습니다(14:2). 그것은 소문에 듣던 대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지 않는지를 관찰하고자 하는 일종의 포석인 것입니다.

(3)   그래서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이 많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마디로 하나님말씀의 뜻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이기적이고도 세속적인 종교생활만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서 상급을 바랄 수가 없다는 지적입니다(14:12).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난한 자와 생계가 어려운 자를 초청하여 떡이라도 떼게 해주어야만 하는데 그러한 노력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천국잔치에 참석할 있는 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4:14).

(4)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회개를 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아야만 하는데 자리의 인사들은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되도다”(14:15b) 단지 천국잔치의 자리가 부러우며 자신도 그곳에 참석하는 복을 누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영적인 무지가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이왕 천국잔치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자리에서 선민들과 바리새인들이 어째서 천국잔치에 참석하지를 못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잔치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더니”(14:15-16) 라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둘째로,잔치할 시각에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일치하게 사양하여,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14:17-18);

(1)   잔치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시각에 참석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잔치할 시각에”(14:17a) 의미입니다. 주인이 어쩔 수가 없어서 일일이 가정방문을 하여 초청을 받은 사람들을 모시고 오라고 종을 보내고 있습니다(14:17b). 비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장차 천국잔치 자리에 참석할 있는 영광을 이미 주셨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19:5-6).

(2)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천국잔치 자리에 참석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이유는 선민들이 천국잔치보다는 세상적인 일과 잔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끼리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먹고 살면 그만이라고 하는 생각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땅에서 선민의 기득권을 보호해주고 물질적인 풍요만 누리게 해주면 그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의 도구인 우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뜻에 비추어 보면, 선민이라고 하여 무조건 천국잔치 자리에 참석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석하는 자들은 예물과 예복을 준배해야만 합니다. 예물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66:20-21). 그리고 예복은 포도주를 담는 부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5:37-38).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그리스도의 대속의 삶을 배워가는 성화를 의미합니다(35:2, 7, 19:10-11, 22:11-12).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선민들은 그러한 준비가 없기에 참석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결과 바리새인들은 선민들과 함께 하나의 담합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일치하게 사양하여”(14:18a)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선민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는 그들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하나님의 천국잔치에 하나같이 참석하지 아니하게 되면 여호와께서도 수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이 보이콧을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천국잔치를 어떻게 시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신이 만만한 선민들입니다. 그래서 각자 핑계거리를 하나씩 마련하고 있습니다.

(5)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는 핑계가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14:18b). 그것은 밭을 사서 농사를 지어 돈을 벌어야 하므로 하나님의 뜻이나 천국잔치에는 신경을 여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핑계가 과연 하나님께 통하게 될까요? 양해가 되지 아니하므로 본문 다음의 문장이 기술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4:21-24). 마침내 하나님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역사에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후순위로 밀리고 마는 비극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은 이르되, 나는 5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4:19-20);

(1)   둘째 핑계는 농사를 대규모로 짓기 위하여 10마리의 소를 샀다는 것입니다(14:19a). 10마리를 2마리씩 멍에를 같이하는 이른바 겨리 묶어 도합 5겨리를 밭농사에 한꺼번에 투입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마치 5개의 쌍두마차가 짐을 싣고서 전차길을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신나게 5겨리 10마리의 소가 한꺼번에 드넓은 밭을 갈아 엎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사람은 기쁨에 들떠 있습니다. 빨리 장관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이나 그곳의 상급과 잔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적당하게 양해를 구하고 사양하고 싶을 뿐입니다(14:19b).

(2)   번째 핑계는 아주 노골적입니다. 장가를 가서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처자식을 먹여 살릴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논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과업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을 해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양해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이유가 바로 이글의 결론입니다.

결론적으로, 밭은 사는 것이나 기업영농을 위하여 소를 구입하는 것이나 또는 장가를 가서 일가를 이루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들이 모두 인생사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후순위로 돌리고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깊숙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서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생의 주인이 자기자신이라면 그러한 우선순위로 살아가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주인의 , 특히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뜻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자가 바로 여호와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부끄럽지 아니하게 천국의 잔치자리에 참여하시는 영광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