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43강(눅13:22-2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31. 16:43

누가복음 강해 143(13:22-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24()

 

문이 닫히기 전에 예루살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하여(13:22-25)

 

예수님께서 공생애 3 6개월 가운데 마지막 6개월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시기 위하여 갈릴리에서 남하를 하십니다. 사마리아를 거쳐서 유대 땅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 일행은 유대 땅의 성과 마을에서 복음사역을 하면서 계속 남하를 하다가 드디어 예루살렘 성이 멀리 보이는 위치까지 도달하게 됩니다(13:22).  

그때 사람의 유대인이 예수님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13:23).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답변을 주시고 있습니다(13:24-25). 의사 누가는 예루살렘 성을 멀리 바라보면서 어느 유대인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질문과 답변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본문에 싣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성도의 삶과 방법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12사도와 제자들은 가슴이 설레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난 3년간 스승으로 모시고서 함께 공생애를 지내온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시고 다윗의 제국을 다시 건설하실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께서 외세를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건설하지 못하실 이유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나라의 중신(重臣, 중요한 신하)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할 있을 것입니다.

(2)   둘째,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는 이유는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을 용서하고 구원할 있도록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방법이 스스로 유월절 양이 되어 대속의 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1:29). 그동안 이방인들을 용서하거나 구원하지 아니하고 선민들만 구원을 받고 세상적인 영광을 모두 누리겠다고 획책했던 유대인들의 잘못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속죄의 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리시는 것입니다.

(3)   셋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앞으로 세상에 널리 전파할 있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수는 많지 아니할 것입니다(13:23). 그러나 그들이 장차 예루살렘 성에 당당하게 입장하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좁은 이라는 용어로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13:24-25).

이상과 같은 생각과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마을로 다니사(through)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toward Jerusalem) 여행하시더니”(13:22);

(1)   예수님의 동선(動線, 움직이는 궤적)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toward Jerusalem) 남하를 하시는데 현재의 지점은 유대 땅입니다. 그곳에서 도시와 시골마을로 다니시면서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주로 그동안 고향이 있는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3년의 공생애를 지내시고 이제는 마지막 반년의 공생애를 예루살렘에서 지내시고자 하십니다. 이유는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성전이 있는 그곳에서 유대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만민구원이며 영생구원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증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3)   이미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의 배척을 받고서 죽음을 맞이하실 것입니다(9:22a). 그러나 무덤에서 3일만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부활하실 것입니다(9:22b, 2:32). 그리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장차 부활하여 영생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은혜의 시대가 임하게 것입니다(22:30, 고전15:22).

(4)   그렇지만 예수님과 함께 남하를 하면서 이제 예루살렘 성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예언은 진작에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청운의 푸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성에 들어가시게 되면 옛날 다윗대왕이 성에서부터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하신 역사가 다시 발생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의 재건으로 밝아오게 되면 자신들은 그동안 메시아를 모신 공로를 인정받아 높이 출세를 하게 것입니다(10:35-37).

(5)   그러한 사도와 제자들의 생각을 이미 읽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의 생각이 세상적인 것이며 허망한 기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대신에 그들이 지녀야만 하는 생각은 다음과 같이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더불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함께 영생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아주고 싶은데 마침 말씀을 비유적으로 전해줄 있는 방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유대인의 질문입니다(13:23).

둘째로,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13:23);

(1)   참으로 기특한 어느 유대인의 질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계자이며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그가 예수님께 여쭈어 보고 싶은 질문은 다른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가 알고 싶은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전부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소수만이 구원을 받을 있는 것입니까?”(13:23a 의역).

(2)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선민만의 구원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예루살렘성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율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년 그들의 달력으로 7 10 속죄일 백성들의 죄를 전부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16:29-30). 따라서 그러한 속죄와 구원의 제도를 지니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은 전부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렇지만 유대 땅에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집회에 여러 참석하게 유대인은 생각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성전과 회당에서 율법생활을 하고 있는 선민들이 의인이며 전부 천국의 백성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선민이라는 표시인 육체적인 할례나 사람들 보기에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신앙생활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2)      대신에 진정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을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으로 선포하며 가르치고 계십니다. 내용은 첫째,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선민들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천국복음으로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 ③셋째, 이방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함께 천국으로 들어갈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4)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있는 유대인이 사실을 한번 확인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질문이 다음과 같습니다; “생각보다 구원을 받을 있는 자가 소수인 것이 맞습니까?”(13:23a 의역).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차제에 제자들과 선민들에게 영생구원을 얻을 있는 방법을 다시 한번 설명해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13:23b)라는 표현으로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셋째로,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

(1)   예루살렘성전에는 출입문이 동쪽에 있습니다. 성문으로 안식일이 되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출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일에도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문으로 성전출입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의 뜰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성전의 출입문은 좁은 문이 아닙니다. 특별히 이방인들이 기도할 있도록 이방인의 뜰까지 성전의 뜰에 마련하고 있으므로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성전의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좁은 문은 예루살렘성전의 출입문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창조가 때에 땅에 내려오는 예루살렘성의 성문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1:1-2). 성문으로 들어갈 있는 자들은 생명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성도들입니다(21:27). 그러므로 수가 생각보다 적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상징적인 수이지만 수가 12지파를 전부 합하여 14 4천명이라고 일종의 제한적인 수로 예언이 되고 있을 정도입니다(7:4-8).

(3)   선민이라고 하여 모두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으로 전해주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따라 만민의 생명을 살리고 함께 영생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여호와의 종답게 살아가야만 합니다(9:22-27).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13:24a)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비록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여도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다수라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시고 있습니다(13:24b).

넷째로,집주인이 일어나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13:25);

(1)   여기서 집주인 창조주를 의미하고 있습니다(13:25a).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번의 기회를 인생 가운데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듣고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한번 인생이 끝나고 나면 후회가 막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아니한 인생들은 문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애타게 문을 두드려도 결코 한번 닫혀버린 문이 다시는 자신에게 열려지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13:25b).

(3)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제멋대로 살아간 인생에 대하여 물론 알고 계십니다. 심판주로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판결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판결이 나서 영생이 아니라 영벌로 확정이 되고 나면 천국의 기록에서 생애가 지워져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상 기억을 하시지 아니하십니다(13:25c).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이 되지 못한 이름자를 가지고서는 아무리 천국의 문을 두드려도 입장을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1:27).

결론적으로, 본문의 말씀은 종말심판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생 가운데에서도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자신의 희생과 헌신이 전혀 없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특히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타인의 희생을 강요할 때에는 하나님의 밖에 나게 됩니다. 그때에는 빨리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만약 회개를 하지 아니하고 계속 자기 좋은 대로 욕심대로 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탐욕과 타락된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아예 관심을 끄시고 내어버려 두십니다(1:28). 그러한 경우가 바로 집주인이 일어나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13:25) 해당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만한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