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129강(눅12:6-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9월 10일(토)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하심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눅12:6-9)
역사적으로 근대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물질문명이 발달하게 되면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만연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하여 효용성을 따지게 되고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의 목숨 값이 크게 가치가 나가지 아니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조는 근대산업화 이후의 것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 당시 고대사회에서도 그러함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군정 아래에서 또한 이방 이두매 출신의 헤롯 왕가가 지배하고 있는 분봉왕의 통치 지역에서 피정복민인 유대인들의 값어치가 별로 대단해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예수님의 놀라우신 말씀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속자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하심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값어치는 이 세상의 것으로 따질 수가 없는 놀라운 것이 됩니다”(눅12:6-9).
그와 같은 뜻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참새 5마리가 2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눅12:6);
(1) 예수님 당시에 유대 땅에서는 로마의 화폐가 통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데나리온과 앗사리온이 들어 있습니다. 1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이라고 세리 마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0:2). 그런데 1데나리온은16앗사리온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1앗사리온은 1/16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작은 금액입니다. 예를 들어 장정의 하루 품삯을 오늘날 기준으로 100달러라고 가정할 경우에 1앗사리온은 6달러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참새가 5마리에 2앗사리온 곧 12달러에 팔리고 있으므로 참새 1마리의 값어치는 시장에서 2달라 40센트 정도입니다(눅12:6a).
(2) 같은 내용을 적고 있는 마태복음 제10장의 기록을 참조하게 되면 그 값어치가 조금 다릅니다; “참새 2마리가 1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마10:29).
1) 사도 마태는 갈릴리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을 보던 전직 세관원 출신입니다(마9:9). 따라서 그는 돈의 값어치와 물가기준에 직업적으로 민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마태는 유대인들이 1앗사리온으로 무엇을 구입할 수 있는지를 다양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의 지표가 1앗사리온으로 2마리의 참새를 살 수가 있다고 하는 물가에 대한 관념입니다.
2) 반면에 그 직업이 의사인 누가는 다릅니다. 그는 우연히 시장에서 어떤 사람이 2앗사리온에 4마리인 참새를 요령 있게 흥정을 잘 하여서 덤으로 1마리를 더 얻어서 참새 5마리를 2앗사리온을 주고서 싸게 사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광경이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의사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 사실을 원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눅12:6a). 그것은 실제 서민생활에 있어서 시장통에서의 흥정의 장면을 묘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3) 당시 시장에서 흥정을 잘 하면 1마리에 2달라 40센트에 살 수가 있는 것이 참새입니다;
1) 그러므로 재산이 100만불쯤 되는 부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자산으로 무려 40만 마리의 참새를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자에게 있어서는 참새의 목숨 정도는 우스운 것입니다.
2)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 참새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모양을 디자인하시고 생명을 불어넣으신 피조물입니다(창1:21).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번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까지 주신 바가 있습니다(창1:22).
3) 그러므로 그 새의 값어치는 돈으로 평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값어치는 하나님께서만 기억을 하시고 있을 뿐입니다. 귀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하게 보호를 해주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눅12:6b).
둘째로,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1)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을 숭상하는 세상이 전개가 되고 나면 사람의 값어치가 얼마나 하찮게 매겨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화학적으로 사람의 인체를 분해하여 그 값어치를 매긴다고 하면 몇 백 달라에 불과하다고 하는 분석까지 매스컴에 등장을 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산업재해나 교통사고로 인명이 손상이 되는 경우 그 보상비가 생각보다 적습니다. 현대사회도 그러하므로 노예제도가 성행하고 있던 고대사회에서는 더더구나 사람의 목숨 값이 헐값입니다. 예를 들어 노예 장정의 매매가가 30-50세겔 정도입니다. 1세겔이 4데나리온이므로 3-5개월 노동을 하여 한 푼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모은다면 장정 노예 1사람을 살 수 있는 돈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현대산업사회에서 대충 하루의 노임을 100달러라고 본다면 노예의 값은 1만2천 달러에서 2만 달러 정도입니다. 그것은 자동차 1대 값에도 미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2) 그렇지만 참새의 경우처럼 그 생명 값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가게 되면 전혀 계산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입니다(창1:26-27).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품성 및 스타일과 직결이 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의 생명 값이 헐값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리지날인 하나님의 값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비록 그 육체는 흙으로 지어져 있지만 그 속에 하나님께서 직접 불어 넣으신 고귀한 생명의 기운이 영혼으로 들어 있습니다(창2:7). 그러므로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영혼을 지니고서 그 육체가 살아 있는 생령(생령, living soul)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지성과 감성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혼적인 기능이 작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영혼의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한다고 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하겠습니다.
(3) 그러한 이유 때문에 참새의 경우보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 대해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더 세심하게 기억을 하시며 그 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1) 여기서 특별히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시는 까닭은 사방에 예수님의 사도와 제자들을 해치고자 획책하고 있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내에 위치하고 있는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 공회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일행의 사역 현장에 끊임없이 랍비와 바리새인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눅5:17, 6:7, 11:15, 38, 53-54).
2) 유대교지도자들은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 일행을 처치해버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목숨에 대한 위협가운데에서도 사도와 제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보호하고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사역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언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겁내어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아니하는 이상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12:8-9);
(1) 요한복음 제5장의 말씀과 같이, 사람이 죽고 나면 부활하여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요5:28-29).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인생으로 살아갔다고 변호를 해주시면 무난히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본문에서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눅12:8)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의 변호로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그 사자를 통하여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그와 같은 이 세상에서의 강력한 보호하심을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이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이삭)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 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22:10-12),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32:1-2).
(4)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예수님이 나의 대속자이시며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고서 지상명령을 진심으로 실천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각별하십니다(마28:18-20).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고서 제자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께 급히 보고를 드립니다. 그리하면 이 땅에 파견나와 있는 하나님의 군대인 사자들이 악한 세력과 싸워서 제자들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행12:7-10, 16:25-34). 오늘날 어려운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영적으로 그러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지상명령을 진심으로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강력하게 보호해주시는 은혜가 각별하다고 한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사역을 하는 경우입니다”.
모든 목자는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모범과 그 복음사역의 선례를 따라서 양들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려야만 하는데 반대로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높이고자 하다가 도리어 성도들을 실족시키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12:9).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처럼 사역을 하지 아니하는 성도들에게는 불이익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그 신분증명을 해주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보호를 철회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당한 성도들이 그후 얼마나 타락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묵상하시면서 우리 모두 자신이 예수님의 변호를 얻을 수 있는 여호와의 종이며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자답을 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시인을 얻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 사자들로부터 강력한 보호를 풍성하게 얻으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강해 제131강(눅12:13-15)(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4.03.24 |
---|---|
누가복음 강해 제130강(눅12:10-12)(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4.03.24 |
누가복음 강해 제128강(눅12:1-5)(작성자; 손진길 목사) (1) | 2024.03.23 |
누가복음 강해 제127강(눅11:49-54)(작성자; 손진길 목사) (1) | 2024.03.22 |
누가복음 강해 제126강(눅11:45-48)(작성자; 손진길 목사) (1) | 2024.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