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28강(눅12: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23. 14:48

누가복음 강해 128(12: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9()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는 예수님의 말씀(12:1-5)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하하시면서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사역과 치유사역 가운데 백성들에게 당장 요긴한 것은 치유사역입니다. 많은 병자와 장애자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를 치유하시고 각종 장애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일찍이 갈릴리 동쪽 호수가에서 그러하였듯이(4:40, 5:15) 수만 명의 백성들이 예수님 일행의 주위에 운집을 하고 있습니다(9:11, 14, 12:1a).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고 주위에 몰려드는 유대인들이 많아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예루살렘에서 파송이 되어온 랍비와 바리새인들의 견제와 탐색이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11:15, 45).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 잠깐 쉬는 사이에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랍비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배우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십니다(12:1b-5). 그러한 가르치심을 주시는 이유에 대하여 먼저 묵상을 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수많은 백성들이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장애자들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유대인사회에서는 수천명의 랍비들이 율법선생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백성들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위하여 간구하고 있는데 어째서 예수님께 몰려든 백성들은 하나같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유가 바로 바리새인들의 신앙상의 문제점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신앙노선 때문이라고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사람의 중심을 먼저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마음속 진실을 보시고 영적으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랍비와 바리새인들로부터 가식적인 율법생활만을 배우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와 치유하심을 얻지를 못하게 되고 맙니다. 결과 영적인 건강과 육체적인 강건함이 병들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셋째, 예수님께서 수만 명의 백성들 앞에서 그러한 사실을 크게 책망하시지를 아니하십니다. 이유는 공개적으로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태도에 대하여 비난을 하게 되면, 그들이 반성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대신에 당장 예수님을 죽이자고 달려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많은 고을을 다니면서 복음사역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골고다 언덕까지 가기에는 아직도 길이 먼데 자리에서 당장 결판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조용히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시면서 단지 폐단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12:1-5).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동안 무리 수만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12:1);

(1)   수만 명의 군중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 몰려든 사건이 일찍이 갈릴리 지역에서 차례 있습니다.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곳에서는 장정의 수만 5천명입니다(9:14). 그러므로 남녀노소를 모두 계산한다면 자그마치 2만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자리에 모여서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듣고 온갖 질병과 장애에 대하여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을 때에는 장정의 수가 4천명이므로 무리의 수가 전체적으로 16천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이 되고 있습니다(15:38).

(2)   갈릴리 지역에는 호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호수의 동쪽 호안에는 넓은 들판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를 받기에 다소 편리합니다. 하지만 남하하여 유대 땅에 들어오게 되면 그렇게 땅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수만 명의 백성들이 몰려들자 서로 디딜 틈도 없이 되고 말았습니다(12:1a). 이에 따라 군중들의 질서를 잡고 사람씩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여 순서대로 질병과 장애를 치유 받도록 만드는 일이 보통 어렵지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수행하느라고 12사도와 수많은 제자들이 혼이 나고 있습니다.

(3)   그렇게 피곤한 중에도 사도와 제자들은 무리 가운데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랍비와 바리새인들의 존재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이고 있습니다(10:25, 11:15, 38, 45, 53-54).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유대 땅에서 예수 일행이 유대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경우 현장에서 랍비와 서기관들은 백성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먼저 시비를 가리고 다음에는 빠짐없이 대공회에 보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빈틈을 노리며 사자같이 물어 뜯으려고 하는 랍비와 바리새인들 앞에서 백성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고 치유사역을 행하고 있으니 예수님 일행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진이 모두 빠질 형편입니다(11:54).

(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운집하고 있는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랍비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하여 질책하시지를 않습니다. 다만 제자들에게만 조용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12:1b). 그와 같은 예수님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분명히 11 말미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11 말미의 기사는 어느 바리새인의 점심식사 초대를 받고서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도중에 발생한 사건입니다(11:37-42). 바리새인이 어느 정도로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집에 몰려든 바리새인들이나 백성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5)   집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을 하시자 얼마나 시비에 휘말려 들었는지 모릅니다(11:37-54).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가급적 대중 앞에서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질타하시는 일을 자제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은근한 방해와 의심스러운 눈총 때문에 모인 백성들의 태도가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심스러운 태도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데 있어서는 엄청난 독소가 되고 있습니다(13: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따라서 점을 우려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도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조용히 밝히고 계십니다(12:1b-5).

둘째로,감추인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에서 전파되리라”(12:2-3);

(1)   하나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경외사상의 시작입니다.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영혼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게 만드시고 계십니다. 창세기 2장의 말씀 그대로,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육신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영혼을 가지고 영적으로 하나님과 코를 맞대고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습니다(2:7). 그런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아니하게 되면 자꾸만 하나님과 코를 맞대고 있는 영적인 생명력이 약화가 되고 맙니다. 지금 히브리 경전을 주석적으로만 연구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는 랍비들의 태도가 그러합니다.

(2)   랍비와 바리새인들은 경전에 대한 이성적인 해석 그리고 남이 보기에 흠이 없는 율법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선민들은 구원을 받으며 현세적인 하나님의 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근본적으로 살피지 아니한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시며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영혼의 상태를 언제나 먼저 살피시고 그곳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실 아니하실 지를 결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삼상16:7).

(3)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귀가 사람들의 귀만큼 어둡고 눈이 사람들의 눈만큼 보지 못하는 구석이 있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사각지대이므로 보지를 못하시고 듣지를 못하신다고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율법선생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갇히어 있는 시간적 공간적인 한계상황을 진작에 초월하고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 진실을 단숨에 통찰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4:13).

(4)   그러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으로 불경스러운 사고방식을 지니고 가시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면서 유대교의 선생으로서 행세를 하고 있는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십니다; “감추인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에서 전파되리라”(12:2-3).

셋째로,내가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죽이고 후에는 능히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죽인 또한 지옥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12:4-5);

(1)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해야만 하는 다른 이유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 세상에서 유한한 인생과 목숨만을 관장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영원한 형벌이냐? 결정하시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2:5 의역). 말씀과 직결이 되고 있는 구체적인 예수님의 설명이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4-29).

(2)   그와 같이 영생과 관련이 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랍비와 바리새인들이 무지합니다;

1)      이유는 랍비와 바리새인들이 전통적으로 전승이 되고 있는 히브리사상과 선민사상에 집착하면서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활용한 히브리 경전과 율법의 연구에만 전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인성과 지성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말씀하시는 앞에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만물을 만드시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피조세계에 현신하시고 또한 계시하시는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에 비해서 비록 하나님의 영의 기운을 생기로 받았다고는 하지만 육체와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영성이 한없이 무디어진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과 지성입니다.

3)      그렇게 시공간에 갇혀 있는 사고방식과 현세적인 용도를 지니고 있는 이성과 지성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은 감히 하나님의 영성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난센스입니다.

(3)   시공간에 갇힌 인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그만 자신들의 현세가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고 맙니다;

1)      기준은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바꿀 수가 없다고 가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현세주의자들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내세보다는 현세를 강조하고 영생구원보다는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탐하게 됩니다. 나아가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권력자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생보다는 목숨과 목숨유지에 필요한 육신적인 건강과 안녕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2)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계십니다; “내가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죽이고 후에는 능히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2:4).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도와 제자들에게 스스로 몸을 낮추어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의미는 동일한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3)      육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과 육신적인 삶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보다는 영생을 좌지우지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현세를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아버지 하나님께 달려있으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은 그것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현세와 육신과 목숨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세와 영혼과 영생은 눈에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있어서는 당장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영생구원이 특징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뜨이는 현세적인 성공이나 선민의 영광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천국복음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만민을 구원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하나님나라에서 함께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의미라고 하는 천국에 대한 소망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②둘째,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백성들의 질병과 장애를 치유해주시고 계십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랍비와 바리새인들은 히브리 정경을 사람들의 이성과 지성으로만 탐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능력이나 성령님의 역사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가지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시고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무한한 영적인 능력으로 만민구원과 영생의 나라를 새로운 세상으로 창조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아무쪼록 자신의 판단과 이성을 앞세우지 말고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특징을 다시 음미하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