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27강(눅11:49-5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22. 21:31

누가복음 강해 127(11:49-5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8()

 

하나님의 지혜를 대신하고자 하는 바리새인의 지식의 폐단에 대하여(11:49-54);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사역에 대하여 크게 반발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1:49-54).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반발할 밖에 없는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해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말씀을 들었던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은 금방 메시지의 뜻을 알아채고서 크게 격분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점을 너무나 정확하게 갈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메시지의 뜻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을 창조한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담겨 있으며 세상을 섭리하시는 경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세상창조와 경영의 이치를 모방하여 자연과 인간사회를 다스려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면, 인간의 지혜는 모방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반면에, 인간의 지혜에는 사람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2)   둘째,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활용하여 분석적으로 연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경전을 이해하고 쉽게 설명할 있도록 자신들의 주석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기도문도 만들고 생활율법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랍비들이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이 가르친 대로 율법생활을 충실하게 영위한다면 유대인들이 여호와께서 선민들에게 주시는 복을 모두 받아서 현세적으로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셋째, 그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사조는 이전 시대에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했던 역사와 다른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생각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가 영적으로 선지자들에게 임해야만 여호와의 말씀의 이치를 바로 깨닫고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쳐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세상의 창조와 경영에 관련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작업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이며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성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인간의 이성과 지성만으로 온전히 파악할 있는 것이 아닙니다.

(4)   넷째,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지식의 열쇠 가지고 무리하게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지자를 대신하려고 하다가 그만 자신들도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백성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마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질타하십니다(11:52).

(5)   다섯째,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선지자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올바른 뜻을 전파하는 시대가 열린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을 이어서 수행하는 자들이 선지자와 사도들입니다(11:49). 예를 들면, 주전 5세기 말의 구약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에 이어서 주후 1세기에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님이 선지자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게 되면 구속자이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계승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11:49);

(1)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같은 것이라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일렀으되라고 하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49a, 15:1).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수가 있습니다.

(2)   그렇게 하나님의 세상창조의 지혜와 세상경영의 이치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호와로부터 위탁 받아서 세상에 전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언급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선지자와 사도들입니다”(11:49b).

(3)   그들은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11:49c); ①첫째 부류는 이미 세상에 와서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입니다. ②둘째 부류는 장차 세상에 와서 박해를 받게 되는 사도들입니다.

둘째로,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세대가 담당하되, 아벨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세대가 담당하리라”(11:50-51);

(1)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선민들이 모두 담당하게 것이라고 언급하고 계시는 것일까요?(11:50) 이유는 모든 선지자들을 죽인 핏값에 대하여 선민들이 예수님을 대속의 구속자로 영접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탕감을 받느냐? 아니면 예수님마저 배척하고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모두 담당하게 되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뉘앙스로 미루어 짐작해볼 , 전자의 탕감이 아니고 후자의 비극이 것만 같습니다(11:50).

(2)   예수님을 구속자이며 구원주로 영접하게 되면 어느 정도의 핏값을 탕감 받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아벨의 피로부터 선지자 사가랴의 피의 값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11:51a);

1)      여기서 아벨은 아담과 하와 부부의 차남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의로운 제사를 드렸지만 카인의 시기심 때문에 억울하게 살해를 당한 자입니다(4:1-8). 아벨을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반열에 올려놓고서 말씀하십니다(11:51a). 그렇게 인류 최초의 형제간 살인사건의 피해자, 그것도 하나님께 제사를 바르게 드렸기 때문에 도리어 살해의 대상이 되고 아벨의 경우를 피를 흘린 선지자의 시초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간 선지자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희생자로 출신을 도무지 수가 없는 선지자 사가랴의 이름을 들고 있습니다(11:51b). 따라서 성경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시가 학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주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요시야를 유다의 왕으로 옹립하고 그를 성군으로 인도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선지자 사가랴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야다 사후에 제멋대로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있는 요시야 왕의 잘못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질책하다가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순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대하23:1-15, 24:1-2, 15-22).

3)      그러나 동일한 내용의 기록, 바라갸 아들 사가랴 피까지”(23:35)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과연 제사장 여호야다의 또다른 이름이 바라갸인지에 대한 확증이 없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일부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지자 스가랴가 살해를 당한 장소가 제단과 성전 사이인 성전의 뜰이며 기록이 역사서의 마지막 책인 역대하 들어 있기 때문에 상당한 신빙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4)      참고로, 의사 누가의 복음서 기록을 따라가 보자면 선지자 사가랴를 세례 요한으로 수가 있습니다. 애초에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의 이름을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 하고자 움직임이 있기 때문입니다(1:59). 그러한 경우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가 또다른 이름 바라갸 불리고 있었는지가 의문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한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의 뜰이 아니라 갈릴리의 분봉왕이 다스리고 있는 가버나움의 감옥인 것입니다(14:3-12).

(3)   하지만 죽임을 당한 마지막 선지자로서는 세례 요한이 맞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보는 경우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고서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은혜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벨의 피로부터 세례 요한의 핏값까지 전부 탕감을 받을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민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회개를 하지 아니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1)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세대가 담당하리라”(11:51c) 하는 예수님의 예언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 다음에 바리새인들이 발끈하여 대들고 있다고 의사 누가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11:53-54).

셋째로,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 너희가 지식의 열쇠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11:52);

(1)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혜’(11:49)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생도들을 모집하여 후진을 양성하고자 노력한 영적인 지도자들입니다. 그와 달리 율법교사인 랍비들은 지식의 열쇠’(11:52)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풀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환언을 하자면,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깨닫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사제지간에 대를 이어가면서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 풀이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집대성한 주석과 율법집으로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2)   2성전시대에 들어서서 100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주전 5세기 말부터 선지자가 없는 시대 400년이 전개가 됩니다. 선지자로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가 등장할 때까지 세월을 바리새인 출신인 랍비와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학문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그들의 인간적인 지식과 이성의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깊은 묵상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주석을 만들고 히브리전승을 연구하며 히브리인들의 선민사상을 체계화하는 것입니다.

(3)   그들의 노력은 마치 주후 19-20세기의 서구의 자유주의신학자들처럼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대신하고자 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문을 막고 있다는 예수님의 질책을 본문에서 호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 너희가 지식의 열쇠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11:52).

넷째로,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11:53-54);

(1)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리새인들이 그만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여 학문적인 율법전수와 현세적인 축복사상으로 변질시켜버리고 말았다는 예수님의 지적에 대하여 서기관들과 랍비들이 강하게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억하심정으로 그렇게 비판을 하시는지 연유를 따지고 있습니다(11:53). 인간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2)   그런데 기본적으로 하나님 신앙이란 선택과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것은 학문적인 토론이나 갑론을박에 의하여 다수파의 승리로 결정이 나는 분야가 아닙니다. 그렇게 토론을 격화시켜 나가게 되면 은혜는 사라지고 영적인 감동은 이성적인 말싸움에 밀려나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피하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서기관들과 랍비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서 계속 논쟁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꼬리를 잡기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11:54).

결론적으로, 주후 1970년에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나온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이성에서의 도피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요지는 하나님의 영성 아래에 사람들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배치하는 것이 옳다는 지론입니다. 젊은 시절 그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 저는 지금도 그렇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인간이 세상의 창조주의 자리에 올라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종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교만과 거만이 되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영성이 가장 앞서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문의 말씀의 뜻을 재삼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많은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