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24강(눅11:37-4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22. 06:49

누가복음 강해 124(11:37-4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5()

 

결례(缺禮, 손발을 깨끗하게 하는 ) 진정한 뜻은 마음속 탐욕과 악독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11:37-41)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대하여 바리새인들의 관심이 드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과 행동은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1)   첫째, 처음부터 부정적인 견해를 날카롭게 피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벙어리에게서 못하게 하는 귀신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서 그것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잠시 빌려서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는 행위라고 무조건 삐딱하게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11:14-15).

(2)   둘째, 예수님의 사상을 직접 확인해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랍비는 영생에 관한 예수님의 견해를 들어보고자 합니다(10:25). 그리고 본문에서와 같이 식사초대를 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자 시도하는 어떤 바리새인도 있습니다(11;37-38).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가 되었든지 간에 시간과 장소를 빌려서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말씀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10:26-37, 11:17-20, 40-41). 그와 같은 예수님의 노력은 때로 신랄한 지적으로 보일 있을지 몰라도(11:42-54) 그것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관심이 없다면 그렇게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일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외면을 해버리실 것입니다(1:28). 그리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옳은 알고 그대로 종교활동을 하다가 백성들을 실족하게 잘못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들어가고 말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11:37);

(1)   유대 땅에 들어오셔서 복음사역을 하시는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많이 찾아가서 사역의 현장을 살피고 있습니다(11:37a). 이유는 가지로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이 선을 보였다고 하는 그러한 놀라운 치유의 능력과 축사(逐邪) 기적 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선지자의 능력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하는 것입니다.

2)      둘째, 나사렛 예수의 주장 가운데에는 유대교인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는 대목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3)      셋째, 혹시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외세를 물리칠 복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닌지 탐지를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가운데 사람의 바리새인은 아예 자기 집에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하고서 예수님 일행을 초청하고 있습니다(11:37b);

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아니하시고 초대에 응하십니다(11:37c). 보통사람 같으면 자신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아니한 그러한 바리새인이 식사초대를 같으면 저의를 의심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고 것입니다.

2)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렇게 처신하지를 아니하시고 계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10:27-37).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기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초대에 응하지 아니하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둘째로, 잡수시기 전에 씻지 아니하심을 바리새인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11:38);

(1)   유대인들이 손발을 깨끗하게 씻는 것은 원래 제사장들의 결례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출애굽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라. 이와 같이 그들이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30:19-21).

(2)   제례의식을 행하는 제사장들의 결례가 전반적인 유대인들의 신체적 결례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결례의식을 백성들의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하여 장로들이 다음과 같은 종교적인 전통을 만들고 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고, 장에서 돌아올 때에는 물을 뿌리고 식사를 것이며, 잔과 주발 등은 겉을 깨끗하게 씻어야만 합니다”.

(3)   그러한 장로들의 유전을 백성들에게 종교적으로 교육시키고 있으며 모범을 보이고 있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점심식사를 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집주인 바리새인입니다(11:38).

셋째로,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11:39);

(1)   집주인 바리새인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십니다. 그런데 설명이 날카롭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 바리새인들이 중시하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에 대하여 먼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11:39a). 그것은 허물이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릇을 깨끗이 하여 식사를 차리는 것은 정결함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잔과 대접의 겉만을 깨끗하게 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지 진짜 중요한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릇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속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11:39).

(2)   유대교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과 영혼의 상태를 먼저 보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탐욕과 악독을 회개하지 아니하고서 그저 겉만 깨끗하고 번지르르하게 포장하고서 계속 자신 있게 백성들 앞에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중심을 통찰하시고 영적인 깨끗함의 상태를 가장 먼저 보십니다; “사람은 외모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그것은 마치 총각인 치과의사가 선을 보러 자리에서도 신부감의 치아상태를 가장 먼저 살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빛으로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고 일치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결례를 강조하면서도 속을 깨끗하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남들이 보기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서 식사를 하라고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잔과 대접 등을 깨끗하게 하라고 가르치면서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청결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것은 마디로, 옛날 카인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람의 눈으로 평가하며 사람을 속일 있으면 하나님도 충분히 속일 수가 있다고 하는 타락한 사고방식입니다”(4:4-10).

넷째로, 어리석은 자들,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11:40-41);

(1)   어리석은 자들,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11:40); 여호와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창세기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땅의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마침내 영혼이 사람의 육신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겉과 속을 모두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창세기 2장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진리라고 하겠습니다(11:40).

(2)   그러나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11:41);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바깥에 있는 육신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 들어 있는 영혼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      사람들은 흔히 세상적으로 생각하고 또한 행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굶주리고 있는 ,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도록 만들어주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빈국이 부국이 되고 나서도 상대적인 빈곤과 욕구불만이 사회적으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물질생활은 향상되는데 비해서 정신생활은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결과 물질만능사상에 젖어서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게 되는지 모릅니다.

2)      나아가서 사치와 향략으로 정신적인 빈곤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자가 야곱이 모든 위험이 사라지자 요단 강을 건너가서 남쪽 벧엘로 가지 아니하고 북쪽 세겜으로 올라간 것과 같습니다(28:17-22, 33:17-20).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보다는 대도시 세겜으로 가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고 마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물질적인 것으로 인간을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로도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영적인 차원의 구원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함께하실 때에 인간의 구제와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논의할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겉이 아니라 속을 깨끗하게 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신앙이란 가지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①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만들었으며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②둘째, 그러므로 창조주를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여호와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선민들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실족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세상나라의 왕을 섬기는 정도로 여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의 왕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임금을 두려워하고 중심으로부터 섬기고 있는지를 파악하지를 않습니다. 다만 백성들이 나라의 법을 지키고 왕명에 복종을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율법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그러하듯이 백성들이 사람들 앞에서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생활에 있어서 구체적인 장로들의 유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례의 규정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겉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속입니다. 마음속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데 겉만 깨끗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며 가식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러한 신앙생활로써는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지 아니면 사람들 앞에 서있는지 점검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