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123강(눅11:33-3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9월 4일(주일)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또한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눅11:33-36)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참으로 알기 쉽게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나라의 차이를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사탄의 나라는 흑암의 나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나라는 빛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어두움 가운데로 끌고 가고자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이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요1:1-4, 14). 그런데 의사 누가는 그 생명의 빛으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1) 첫째,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주위를 환히 밝히기 위하여 그것을 등경 위에 둡니다(눅11:33).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빛을 환히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욕심에 이끌려서 그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을 감추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반역 행위입니다.
(2) 둘째, 눈이 어두우면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생명의 빛을 보고서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눅11:34).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야만 합니다(눅11:35).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그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으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서 얼른 하나님께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마음의 눈이 밝아지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눅11:36).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11:33);
(1) 사람들이 등불을 켜는 이유는 방안을 환히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눅11:33b);
1) 그러므로 등불을 켜서 그것을 감추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눅11:33a). 그리하면 등불로 주위를 밝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생명의 말씀의 빛을 자꾸만 흑암의 세력으로 감추고자 획책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입장 때문에 그러합니다.
2) 구체적으로, 선민사상과 현세사상으로 똘똘 뭉쳐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러합니다.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구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외면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영생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자꾸만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그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잠시 빌려서 그렇게 귀신을 쫓아내는 체 하고 있는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거짓말까지 서슴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눅11:15).
(2)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눅11:33a)라고 하는 문장 가운데 두 가지의 용어가 다소 생소합니다;
1) 첫째, 여기서 ‘움속’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작은 움막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큰 방안에 작은 움막이 있어서 그 속에 등불을 켜 두게 되면 작은 움막만 밝힐 뿐 큰 방 전체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킹 제임스 번역본’에서는 그 움속이라는 말을 “a secret place”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움막보다 더 작은 의미의 폐쇄적인 공간이 ‘말 아래’입니다. 그것은 “under the bushel”(KJV)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부셀은 36리터의 용기를 말하므로 두 말 정도의 용량입니다. 그 두말이 큰 말로 하나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대두 한 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래’(under)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해가 어렵습니다. 일단 그것은 ‘말 속’이라고 하는 뜻으로 볼 수가 있겠는데 그렇게 되면 등불은 오래지 아니하여 산소의 부족으로 그 불이 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3)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11:33b)고 하는 문장에는 ‘들어가는 자’가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해서는 그 생명의 등불이 환히 밝히고 있는 그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복음도 듣고 치유도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발걸음을 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천국의 복음과 치유의 은혜가 그냥 주어지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둘째로, “네 몸의 등불이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1) 흔히 눈을 마음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삐뚤어져 있으면 진실을 놓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오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눅11:34). 예를 들어보면, 벙어리 귀신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쫓아내고 있는 예수님의 축사의 기적을 보면서도 유대교지도자들은 그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잠시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는 척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흑색선전을 하고 있습니다(눅11:15).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대하여 일종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은 예수님의 생명살림의 현장을 보면서도 그 진리의 빛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흑암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빛을 옳게 보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소위 ‘눈뜬 소경’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사6:9-10).
(2) 그러므로 생명의 빛을 바로 보고 그 빛의 생명력을 받아 들이지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마음의 창을 깨끗하게 닦도록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비추고 그 생명의 능력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한 마디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눅11:33). 그러한 자는 그 방안에서 생명의 빛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11:35);
(1) 가장 먼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점검을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치유의 능력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지도자들처럼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유대교리와 메시아 사상에 사로잡혀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그 공생애의 모습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자신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속에 있는 마음의 빛이 영적으로 어느 정도 어두워져 있는지를 자체 점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눅11:35). 만약 나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가 방해가 된다고 계속 판단하고 있다면 여전히 사탄의 나라 그 흑암의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눅11:36);
(1)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성도들에게 임재할 수 있도록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눅24:49, 요14:16). 그 말씀 그대로 오순절날 기도하고 있던 120명 정도의 제자들에게 한꺼번에 성령의 세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행2:1-4). 그때부터 성령님께서는 두 가지로 역사를 하시게 됩니다; ①첫째,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내주하여 역사하시게 됩니다(Holy Spirit in the Christian). ②둘째, 성도들 사이에서 역사하시게 됩니다(Holy Spirit among the Christian).
(2) 먼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천국복음으로 그 마음속에 받아 들입니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그 속사람 속에 성전을 삼으시고 내주 역사하시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던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나라의 구성원으로 그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공생애를 살아가면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행2:42-47).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됩니다. 그러한 예배의 장소에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를 하십니다. 소위 성도들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among’의 성령님께서 말씀의 빛을 생명의 빛으로 더 강력하게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빛을 받아서 성도의 속사람 속에 있는 성전은 더욱 밝아지는 것입니다(눅11:36).
결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등불을 높은 등경 위에 두고서 온 방을 환히 밝히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이 온 세상에 전해지며 많은 사람들이 그 생명의 빛 가운데로 나아 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방해하며 그 생명의 빛을 가두어 버리려고 하는 흑암의 세력이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입장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과 다르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저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의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여 예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흑암의 세력이 욕심과 탐욕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정직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나라로 옮겨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내주 역사하시게 됩니다. 온 몸이 밝아지며 예수님의 복음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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