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25강(눅11:42-4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22. 06:51

누가복음 강해 125(11:42-4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6()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신앙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가지에 대하여(11:42-44)

 

본문에서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시는 가지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디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신앙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바리새인들은 안의 것을 챙기지 아니하고 바깥의 것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11:42). 그렇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언제나 안의 것이 먼저입니다(11:41). 왜냐하면, 사람의 안에 있는 영이 살면 육체가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8:10-11).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어떻게 만드셨는가를 묵상해보면 금방 수가 있습니다; “흙으로 만든 육신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을 코에 불어 넣으시자 사람이 살아 있는 영혼을 가진 존재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2:7). 그래서 유일하게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뜻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며 명령대로 만물을 관리할 있는 여호와의 청지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4:23-24)”.

(2)   둘째, 바리새인들은 높은 자리를 탐하고 낮은 자리를 버리고 있습니다(11:43).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째서 하나님의 산에 강림을 하시고 선민을 택하시고 제사장의 나라를 만들고 계시는가 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는 엉터리 신앙생활입니다;

1)      하나님신앙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찾아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기에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12:1, 15:1, 17, 17:1, 18:1, 33, 35:9-13). 높은 하늘에서 낮고도 낮은 피조의 세계로 내려오신 것입니다(2:5-11). 그러므로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영적인 지도자들은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있어야만 합니다.

2)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신 이유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는 이유는 제사장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19:5-6).

3)      제사장나라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속죄할 뿐만 아니라 원수가 모든 이방인들의 죄도 속죄하는 제사도 드려야만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회개를 시켜야만 합니다(3:1-10, 11:29-32). 그리고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갈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간구해야 합니다(18:23-33, 28:18-20). 그것이 선민들이 제사장나라로서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만 하는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3)   셋째, 하나님신앙은 현세의 복에 만족하고 내세에 대해서는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11:44). 죽고 나면 모든 것이 허사이며 자신의 무덤이 허물어지든지 말든지 자신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짓밟히든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신앙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인생 가운데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모습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평생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영혼이 죽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부활의 몸을 입고서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22:28-30). 그와 같은 부활과 하나님 자녀로서의 영생의 소망을 지니고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신앙의 모습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 운향 모든 채소 십일조 드리되, 공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11:42);

(1)   바리새인은 십일조생활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비유 가운데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십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8:11-12).

1)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십일조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너희가 박하 운향 모든 채소 십일조 드리되”(11:42b). 가축과 곡식은 물론 식물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바치고 있습니다.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모든 채소 그리고 대표적인 허브 박하(mint) 운향(rue)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빠짐없이 철저하게 십일조를 챙겨서 성전에 바쳤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2)      참고로 여기서 운향’(rue) 별명이 은총의 ’(herb of grace)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유는 사제들이 성수를 뿌릴 운향의 줄기를 묶어서 사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운향은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방충제로 유명하며 특히 성분은 혈압강하제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향신료로 사용이 됨을 물론 기타 여러가지 약효를 지니고 있어서 고대사회에서는 만능의 약으로 불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이 잘못되어 있다고 강하게 질책하시고 있습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것이라고 하는 막말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11:42a). 그렇게 노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1)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겉치레만 요란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속을 먼저 들여다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으로 때에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삼상16:7, 4:23-24). 도저히 눈뜨고는 이상 용인할 수가 없는 파렴치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디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눈까지 속이고자 하는 기만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십일조를 바치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있어서는 빵점입니다; “공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버리는도다(11:42c).

2)      예수님께서는 가장 계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하나님신앙을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첫째는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②둘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3)      좀더 풀이를 해보자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나의 생명을 돌보듯이 그렇게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 돌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이웃사랑의 방법론입니다.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심을 적고 있습니다(11:42c).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십일조생활을 하게 되면 그것이 온전한 신앙생활이라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11:42d).

둘째로,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 높은 자리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11:43);

(1)   세상에서 낮은 자리를 선호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높은 자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상승의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데렐라 이야기 바보 온달의 이야기 인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을 바라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청출어람’(靑出於藍, 제자가 스승보다 더욱 뛰어나는 ) 후세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태에 비추어보면, 평생을 바쳐서 율법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켜주고 있는 바리새인 랍비나 서기관들이 존경을 받으며 종교적으로 상석(上席, 높은 자리) 차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11:43).

(2)    그렇게 종교적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회당의 상석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동기부여가 없으면 누가 평생을 바쳐서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연구하고 강론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첫째, 여호와께서 하나님신앙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나누어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12:1-5).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믿음의 본을 보여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처럼 이방인들을 미워하고 선민으로부터 높임과 존경을 받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브라함의 후손과 믿음의 후손들이 행할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창대하게 하여 이방인들을 지배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불심판을 당할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웃의 성읍인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18:23-32). 그러한 삶을 살아간 아브라함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20:7, 4:16-18).

(3)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민으로 삼아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맡기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19:5-6).

1)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사명을 저버렸기에 선민의 나라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선민의 사회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을 비롯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2)      그런데 그들은 그러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회당의 상석을 차지하고 시장에서 높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고 문안을 받던 습관에 젖어서 예수님 앞에서도 도무지 겸손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11:43).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이 결코 심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위를 밟는 사람 알지 못하느니라”(11:44);

(1)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가장 슬프고 허무한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문장입니다; ①첫째, 사람이 죽은 다음에 무덤조차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입니다. ②둘째, 봉분이 사라져버렸으므로 그것이 무덤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밟고서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생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으므로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2)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자손을 남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역사 가운데 남기기를 소원합니다. 가능하다면, 평생을 바쳐서 가장 높은 자리 정상으로 올라가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불멸의 존재로 남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일단 죽고나서 시신이 공원묘지에 안장이 되면 30 자리에 머물 수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후손에 의하여 단지 차례 30 연장할 수가 있을 따름입니다.

2)      개인의 묘지나 국립공원에 안장이 경우라고 하더라도 훗날 찾아오는 후인들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들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옛날의 인물을 누가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하고서 수백 년이나 기리고자 하겠습니까?

3)      그렇다면, 영원히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부활의 몸에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때에 허망함과 소멸의 슬픈 운명을 벗어날 수가 있게 됩니다.

4)      그러므로 남은 인생을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겉으로 공의의 정신을 구현할 때에 평토장한 무덤의 신세를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11:44).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특징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피조물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합니다. 그것이 공의의 정신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도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이 됩니다. 물론 성도간의 교제와 모두가 함께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도 소중합니다. 따라서 일을 위해서도 십일조는 사용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선생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만 사람들이 때에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있어서 공의의 정신이 빠져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십니다(11:42).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 부족하기에 그들에게 군림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탐욕을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11:43).

그렇게 속으로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죽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허망하고도 슬픈 인생이 되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11:44).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처럼 이웃과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끝까지 대속의 삶을 살아가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