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14강(눅10:38-4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15. 02:47

누가복음 강해 114(10:38-4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26()

 

많은 메뉴를 준비하여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고자 분주한 마르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10:38-42)

 

예루살렘은 옛날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오랜 수도이면서 동시에 유대교의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곳입니다. 주전 10세기부터 1,000년의 세월을 예루살렘은 그렇게 유대인들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비록 선민의 나라는 망하였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예루살렘성전이 남아 있으며 다윗 왕조에 대한 기억과 소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의 자존심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헬라에 이어서 중근동과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은 문화적으로 헬라의 문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헬레니즘과는 완전히 다른 헤브라이즘에 대해서도 관대합니다.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의 독특한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에 대하여 종교적인 자치권을 허용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로마제국의 배려에 힘입어서 유대교의 명절인 절기 때가 되면 국내외의 많은 순례객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12:20-21, 2:5).

그와 같은 형편이므로 780m 고지대 좁은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예루살렘의 성내에서는 물가가 비싸고 숙식비가 엄청납니다. 마디로, 산업이 별로 없는 예루살렘이 대표적인 소비도시로 손꼽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변방 갈릴리의 순례객들은 예루살렘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볼일이 있어 들릴 때에는 근교에 있는 민박집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민박집으로 인기가 있는 마을이 바로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에 있는 야트막한 감람산을 넘어서면 나타나는 마을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리가 5리쯤으로 예루살렘에서 매우 가깝다고 합니다(11:18).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시골마을 베다니의 숙식비는 예루살렘에 비해서 상당히 쌉니다.  따라서 갈릴리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르기 전에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이름 그대로 나무가 많고 물이 좋은 마을입니다. 그리고 단골에 대해서는 인심이 후한 민박집이 많이 있는 마을입니다. 

3 6개월의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예수님은 12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차례 방문하십니다. 그때마다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히 예수님과 베드로는 서로 나이가 비슷한 민박집 주인 나사로와 좋은 친구사이가 되고 있습니다(11:11). 그리고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오라버니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가운데 언니인 마르다는 실질적으로 민박집의 여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민박 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느라고 분주합니다(10:40). 하지만 나이가 그보다 어린 여동생 마리아는 아직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일행이 자기 집에 머무르게 되면 그들 사이에 끼어서 동안의 복음사역 이야기를 듣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10:39).

오늘의 본문은 그러한 배경 아래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가운데에는 신앙생활에 적용해야만 하는 귀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들이 때에 예수께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 이름하는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10:38);

(1)   의사 누가는 어째서 유명한 베다니 마을의 이름을 적지 아니하고 그냥 마을’(10:38a)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누가가 베다니 마을의 이름을 모르고 있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24장에서 다음과 같이 명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24:50-51). 의사 누가는 베다니에서 예수님의 승천이 있게 된다는 사실까지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근교마을인 베다니와 그곳에 살고 있는 나사로의 가족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많은 마을 가운데 하나의 마을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을에서 발생한 일이 모든 마을에 적용이 수가 있다고 하는 뜻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 표현의 양식이라고 하겠습니다”. 환언하면, 예수님의 교훈을 일반화하는 가지 방법인 것입니다.

(3)   마을에 예수님 일행이 들어가시자 어떻게 소식을 먼저 들었는지 마르다가 동구(洞口, 동네 입구) 앞까지 마중을 나오고 있습니다(10:38). 그리고 예수님과 일행을 모두 자기 집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대목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일행이 집에 머물 것이라고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쯤 도착할 예정이라고 이미 전갈이 있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시간을 맞추어서 그들을 동네 어귀에서부터 안내하여 자신의 집으로 맞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러한 관계는 아주 친한 사이이거나 민박집의 단골관계에서 엿볼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경우가 사도 요한에 의하여 훗날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집의 주인인 나사로가 아주 친한 친구 사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11:11). 그런데 나사로가 그만 중병이 들어서 목숨이 위태하다고 여동생 마르다가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님께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11:3). 선지자인 예수님께서 왕림하여 부디 자신의 오라버니를 치유해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늦게 가십니다(11:6-7). 그때에도 목을 빼고서 예수님의 왕진을 기다리고 있던 마르다가 초상을 치르고나서 동네 어귀로 먼저 뛰어나오고 있습니다(11:20).

(5)   그와 같은 사실은 가지를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단골손님이 되었든지 선지자가 되었든지 예수님을 특별하게 귀중한 손님으로 영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고자 열심입니다. 비록 숙식비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주고자 합니다(10:40). 그리고 오라버니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을 때에도 예수님만 일찍 시간내에 자기 집에 오시면 충분히 나사로를 살리실 수가 있다고 확실하게 믿고 있는 여성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 그렇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마르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또다른 교훈이 그녀의 동생 마리아로 말미암아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10:42).

둘째로,그에게 마리아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동생이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10:39-40);

(1)   예수님 일행이 12사도까지 도합 13명입니다. 그리고 마르다의 집에는 식구가 3명입니다. 그러므로 민박집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마르다는 16인분의 식사준비를 하느라고 부엌에서 동동걸음을 치고 있습니다(10:40a). 너무 일이 바빠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주어야 하는 주방보조(kitchen hand) 마리아가 정신을 곳에 두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유대 땅에서의 복음사역의 이야기와 또한 제자와 스승사이의 문답의 이야기를 듣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입니다(10:39).

(2)   혼자 부엌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 마르다가 모습을 보고서 가까이 다가가서 소리로 예수님께 통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동생이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10:40b). 얼마나 일이 바쁘고 돕는 손길이 부족하면 실례인 알면서도 예수님 가까이 접근하여 마르다가 그렇게 부탁을 하고 있겠습니까? 말을 들었으면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야 것입니다; ①첫째,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얼른 가서 언니의 부엌일을 도와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②둘째, 말을 듣기에 앞서 마리아가 자발적을 벌떡 일어나서 언니를 돕기 위하여 부엌으로 뛰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변화도 발생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럴까요?

셋째로,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염려하고 근심하나, 가지만 하든지 혹은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1-42);

(1)   예수님의 말씀이 의외입니다; ①첫째, 좋은 식사대접을 위해서 여러가지 요리를 준비하느라고 마음이 분주하며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10:41). ②둘째, 구체적으로 식사를 위한 요리는 한두 가지라고 하더라도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10:42a). ③셋째, 식사준비를 하는 시간을 줄이고 간단한 음식으로 만족하면서 남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선택하고 있는 좋은 것입니다(10:42b).

(2)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선택이 바람직한 것이며 그것을 보호해주기를 원하신다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10:42c). 말씀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땅에서의 삶이란 육신을 위하여 좋은 음식을 많이 요리하여 먹고 즐기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그리스도에게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 먼저입니다.

2)      비록 유한한 인생, 좁은 땅에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정신만은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시고 또한 선을 보여주시는 천국복음과 치유의 능력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으로 충만해질 수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세계에 대한 무한한 동경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설 수가 있습니다.

3)      성도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버지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속에서 살게 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믿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리아를 보호하시고 도와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마르다의 시대나 오늘날의 시대나 마음이 분주하고 하는 일이 많아서 바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하여 민박집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처녀 마르다가 얼마나 일에 바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너무 시간을 많이 사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에 너무 분주하고 바빠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한두 가지 반찬으로 만족하게 식사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사역에 동참할 있도록 예수님의 공생애를 묵상하고 깨달음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인생의 목적은 땅에서 단지 육신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사람을 대접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분주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어떠한 꿈을 꾸면서 모험적인 공생애를 살아가셨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길에 펼쳐지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새로운 시대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요컨대, 날이 갈수록 하나님나라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대감이 커져가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이루어가는 자신의 남은 삶에 대하여 더욱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처럼 총총한 눈망울을 끝까지 지니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성도의 삶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