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16강(눅11:5-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16. 16:36

누가복음 강해 116(11:5-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28(주일)

 

영육간에 굶고 있는 사람을 먹이고 살리기 위하여 어떻게 부르짖어야만 하는가?(11:5-8)

 

  의사 누가는 주기도문을 등재한 다음에 바로 본문의 말씀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주기도문과 관련이 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의사 누가가 적고 있는 주기도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성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백성들로부터 거룩하게 여김을 받을 있도록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11:2a, 19:5-6).

(2)   둘째, 하나님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백성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11:2b, 28:18-20, 1:8).

(3)   셋째,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실천하신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모습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갈 있도록 매일 성령님의 능력을 구해야만 합니다(11:3, 24:49).

(4)   넷째, 하나님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해치려는 자까지 용서를 주어야만 합니다(11:4a, 23:34, 50:20).

(5)   다섯째,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실족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만 합니다(11:4b). 성도가 믿음의 본을 보이지 아니하여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면 전도의 문이 닫힐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이끌리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18:6).

의사 누가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해하고서 성도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면 가지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뜻에서 본문과(11:5-8) 다음 문단의 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1:9-13). 먼저 본문의 글은 영육(靈肉, 영적인 것과 육적인 ) 간에 굶고 있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간구하여야만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글은 성도가 세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관하여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여기서는 본문의 말씀부터 구절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있는데 밤중 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11:5-6);

(1)   예수님께서 비유로서 가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직후에 하신 말씀으로 보입니다. 의사 누가는 본문의 말씀이 주기도문과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이미 알고서 그렇게 수록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성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공생애를 살아가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아가페적인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안전과 이익부터 챙기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반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창조주의 도우심과 성령님의 능력의 임재가 절실한 것입니다.

(3)   가지 예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벗이 곳에서부터 찾아왔는데 마침 자신의 집에는 저녁거리가 없습니다. 길을 걸어서 찾아온 친구를 차마 그대로 굶긴 자라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날이 어두워졌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한 다른 친구를 찾아가서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수밖에 없습니다(11:6). 양식을 꾸어 달라는 것입니다(11:5).

둘째로,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11:7);

(1)   밤중에 찾아온 이웃 친구가 갑자기 덩이를 꾸어 달라고 합니다. 참으로 귀찮은 일입니다. 저녁거리가 없으면 다음날 열심히 남의 일이라도 하여 돈을 벌어서 양식을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합리적으로 조치를 생각은 하지를 아니하고 단지 이웃의 친구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찾아와서 양식을 빌려 달라고 하니 당연히 반갑지가 않습니다.

(2)   그러므로 이미 식구들이 잠자리에 들었으니 귀찮게 하지를 말고 조용히 물러가라고 하인을 시켜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웃사람들도 모두 문을 잠그고 잠을 청하고 있는 시간에 남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그것은 안면방해가 된다고 예의도 없는 행위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렇게 수가 없습니다(11:7). 왜냐하면, 다음의 특이한 사정설명이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밤중에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있는 이웃 친구의 설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 길을 걸어서 벗이 저녁에 찾아 왔는데 종일 굶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마침 우리 집에서는 저녁거리가 없어 모두들 굶고서 일찍 자려고 하다가 친구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대로 자면 되지만 도저히 종일 굶고서 길을 걸어서 우리 집을 찾아온 친구만은 그대로 굶은 잠을 이루게 수가 없다. 너무 시장하여 자다가 변을 당할까 겁이 난다. 그러므로 부디 친구를 살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니 덩이를 빌려 달라. 내일 남의 일이라도 하여 내가 갚도록 하겠다”(11:6).

(4)   사람의 간절한 요청은 자기 식구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곳에서 찾아온 친구의 상태가 심각하여 그를 돌보고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냥 두면 너무 시장하여 다음 일어나지를 못할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는 가지의 경우를 떠올리게 합니다; ①첫째,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종일 굶고서 예수님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대로 굶은 집으로 돌려보내게 되면 도중에서 기진하여 쓰러질까 예수님께서 걱정을 하십니다(8:3). ②둘째, 선한 사마리아인의 경우입니다. 여리고 골짜기에서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자 합니다(10:33-37).

(5)   가지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해결책을 얻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여주시고 또한 비유로써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고 부르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다른 이유를 말하면서 모른 하지를 아니하시는 것입니다(11:7). 따라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생명을 살릴 수가 없다면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셋째로,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요구대로 주리라”(11:8);

(1)   사람들은 보통 신분상의 관계 때문에 서로 돌보아주고 귀찮더라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신분상의 관계 때문에 특혜를 주거나 돌보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모두를 똑같이 대접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부터 사랑하는 공의의 정신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피조물인 인간이 실천하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서로가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분상의 관계나 친구 관계라고 하는 것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식구가 굶고 있다면 남이 굶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3)   그러므로 본문에서 굶고서 길을 걸어 자신을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양식을 빌리러 사람은 특이한 자입니다. 자신과 식구의 시장기를 면하기 위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살리기 위하여 양식을 꾸어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이웃이며 남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실 수가 없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요구대로 주리라”(11:8).

결론적으로, 흔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으면 긍정적인 응답을 받을 수가 있다고 풀이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간절하게 계속 떼를 쓰듯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에 힘써라고 말하면서 본문의 간청함이라는 용어를 자주 원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의 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밀어 부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의사를 무시한 간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이 성공을 하고 소원성취를 하기 위하여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르짖는 소리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피조물을 모두 돌보고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러한 방법을 찾아 내어 구원을 베푸시고자 하십니다. 방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성육신시켜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속죄의 제사의 방법입니다(1:29, 7:26-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해서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방법을 묵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웃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본문에서와 같이 간구해야만 합니다.

요컨대, 그것이 이미 출애굽기에서 선을 보이고 있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신앙고백을 실천하는 방법론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주기도문의 뜻을 따르고 있는 본문의 이웃처럼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