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13강(눅10:33-3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14. 15:49

누가복음 강해 113(10:33-3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25()

 

강도 만난 예루살렘 사람의 이웃이 되고 있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하여(10:33-37)

 

어느 예루살렘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여리고 골짜기에서 강도 떼를 만나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죽을 만큼 구타를 당한 후에 길가에 버려져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10:30). 모습을 보고서 길을 지나간 사람은 종류입니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등입니다(10:31-33). 그들이 각각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비유로써 말씀하십니다;

(1)   첫째, 제사장은 예루살렘성전에서 동안 제례의식을 집행하도록 24반차를 쫓아 기간 동안에 선발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급히 고향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본체만체 하면서 그냥 지나치고 있습니다(10:31). 제사장의 명분은 아마도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중요한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2)   둘째, 레위인은 여호와를 섬기는 지파의 사람입니다. 가운데 아론의 후손들은 자신의 반차가 돌아올 때에 심지를 뽑아 운이 좋게 제사장이 되면 동안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확률이 낮습니다. 왜냐하면, 평균 하나의 반차에 800 정도의 아론의 후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반년에 10명이 차출이 되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보면 당첨이 확률이 1/80입니다. 당시 평균수명이 40세입니다. 그러므로 30세부터 가능한 제사장의 직무는 평균 10 정도 제비뽑기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0 동안에 제사장으로 당첨이 확률은 (1/80)x2x10=1/4입니다.

2)      그렇게 아론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제사장으로 평생 한번 직무를 제대로 행할 확률이 25% 정도로 낮기 때문에 평소에는 제사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정경을 공부하여 랍비가 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아론의 후손이 아닌 레위인들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레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히브리 정경을 공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3)      하지만 그러한 레위인도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 사람을 구해주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사람을 피하여 지나가고 맙니다(10:32).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말씀을 아는 것과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는 일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셋째,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 젖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보다도 못한 잡종들이라고 욕하면서 상종하기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9).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목숨이 위험한 예루살렘 사람을 외면하지를 않습니다(10:33-34). 원수와 같은 예루살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버려 두면 죽기 십상이므로 급히 구해주고자 합니다.

이상과 같이 비유로써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이 어떻게 예루살렘 사람을 구해주고 있는지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10:33-37). 본문의 상세한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10:33-34);

(1)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면목과 창조주의 영광을 한번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선도하고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이 앞서 가면서 이렇게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하나님의 영광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며 긍휼 가운데 드러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푸는 자입니다. 가지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고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가식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낙제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사마리아 사람만이 합격점을 받고 있습니다.

(3)   하나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불쌍하게 여긴다고 하는 긍휼의 마음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10:33). 긍휼히 여긴 대상의 목숨을 돌보고 살려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은 먼저 응급조치를 취합니다(10:34). 그것은 당시의 다음과 같은 first aid입니다; ①첫째,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소독합니다. ②둘째, 옷감으로 싸매어줍니다. ③셋째, 주막으로 운반하여 돌보아 줍니다.

둘째로,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2 내어 주며 이르되,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10:35);

(1)   지금까지 사마리아 사람이 생면부지의 예루살렘 사람을 치유하고 주막에서 돌보아준 것으로 충분한 선한 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람을 책임지고 돌보아주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보아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①첫째,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 사람을 재난에서 구하고 끝까지 살려서 자기 집을 찾아갈 있도록 돌보아 주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②둘째, 하나님께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2)   사마리아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1)      물론, 불쌍하게 여겨서 도와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응급조치를 취해주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득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볼일이 급하여 다음날 여행에 나섭니다. 그는 아마도 요단 강을 건너서 동쪽지역에서 볼일을 보아야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막의 주인에게 환자를 돌보아 달라고 자신의 이틀 품삯을 지불합니다(10:35a).

2)      그리고 반드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 환자를 돌본 추가요금을 자신이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10:35b). 자신의 처지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환자를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예루살렘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속에는 환자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끝까지 돌보도록 보내어 주셨다고 하는 인식이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6:37).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에게 주시는 마음입니다.

(3)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긍휼한 마음만 가지고는 되지가 않습니다. 반드시 시간과 재물이 필요하며 끝까지 책임을 지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희생과 헌신이 요청이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죽음의 위기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땅에 성육신시키고 공생애를 살게 하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2:5-11).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8-39).

  셋째로, 생각에는 3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10:36-37); 비유의 말씀을 끝내시면서 예수님이 랍비에게 묻고 계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10:36). 랍비는 쉽게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10:37a).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10:37b);

결론적으로, 말로써 답변을 한다는 것과 실제로 그와 같이 행동을 한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랍비가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을 하자면 참으로 결단과 신앙생활의 변혁이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만 돌보고 생명을 살리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위기에서 구해주도록 자신에게 보내어 주시는지를 여겨 보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좋은 이웃의 개념을 한참 뛰어넘고 있는 차원의 것입니다. 이방인 구원을 도외시하고 선민만의 구원을 도모하고 있는 좋은 이웃의 개념이 아닙니다. 선민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가족과 친지에 국한하여 도와주고 돌보아 주고자 하는 소위 좁은 의미의 좋은 이웃의 개념은 더더구나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가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좋은 이웃이 되라고 하시는 뜻은 첫째,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5:43-48). ②둘째, 자신에게 보내어준 위기에 처한 자는 자신의 선호도를 떠나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돌보며 살려주라고 하는 것입니다(25:34-40). 그것이 진정한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그러한 실천을 하고 있는 자가 성도이며 좋은 이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좋은 이웃이 있도록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