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12강(눅10:29-3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14. 15:48

누가복음 강해 112(10:29-3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24()

 

어떤 율법교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과 예수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이웃의 차이(10:29-33)

 

본문의 이야기는 어떤 율법교사가 자신의 신앙생활을 자랑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과 관련된 것입니다(10:29-33). 율법교사 랍비는 예수님을 히브리 정경에 대한 지식과 해석이 뛰어난 랍비의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라고 처음부터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호칭하면서 자신의 질문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랍비 자신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신명기 6장의 쉐마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는 , 나아가서 레위기 19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웃사랑의 실천 등이 영생을 얻을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랍비 자신의 생각을 물었기에 조심스럽게 그렇게 답변을 했더니 그것이 옳다고 예수님께서 칭찬을 해주신 것입니다(10:28).

기분이 좋아진 랍비는 이왕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김에 많은 무리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랍비인지를 자랑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웃이 누구니이까?”(10:29). 랍비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답변의 말씀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웃을 돌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는 가정생활에 있어서 모범적입니다. 교우관계도 좋습니다. 친척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으로 그는 좋은 이웃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들고 있는 예화가 랍비의 생각을 한참이나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유는 예루살렘의 선민인 유대인과 유대인들이 천시하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좋은 이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0:30-37).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웃의 의미는 랍비가 생각하고 있는 아주 좁은 의미의 이웃의 개념과는 폭이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사랑의 개념을 창조주의 시각에서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랍비는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좋은 이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랍비의 이웃사랑이란 자신의 가족과 친지 가운데 자신에게 호의적인 자들을 사랑하는데 그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사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이웃이 누구니이까?”(10:29);

(1)   여기서 사람’(10:29a) 유대 땅의 어느 랍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 자신의 마을에 들린 예수님을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만나고 있습니다(10:25).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하셨습니다(9:52). 예수님께서는 70명의 제자를 35개조로 일시에 파송하여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복음사역을 조기에 마무리하십니다(10:1-20).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하를 하시면서 지금 유대 땅의 어느 마을에 들리신 것입니다(9:51, 10:25).

(2)   랍비는 일종의 공명심을 지닌 바리새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예수님을 시험하는 동시에 자신의 율법지식을 주위에 뽐내고자 영생을 얻는 방법 대하여 질문을 했습니다(10:25). 결과 예수님의 답변이 자신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칭찬까지 얻게 됩니다(10:28). 이에 신이 랍비는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운 신앙을 주위사람들에게 과시하고자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이웃이 누구니이까?”(10:29b).

(3)   랍비는 마을의 회당에서 동네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입니다. 그가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있는 방법은 가지입니다; ①첫째, 히브리정경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야만 합니다. ②둘째, 율법생활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율법지식에 대해서는 영생에 관한 질문을 통하여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므로 마을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율법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낼 차례입니다. 그것이 랍비가 여기서 이웃사랑에 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의도입니다(10:29).

(4)     랍비는 예수님의 답변이 어떠하리라고 이미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틀림없이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친척을 사랑하며 율법을 지키는 선민을 사랑하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랍비는 이미 자신이 그러한 이웃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자리에 모여 있는 동네사람들이 자신들의 랍비가 율법에 비추어 흠이 없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한 상상을 하면서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랍비입니다.  

둘째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버리고 갔더라”(10:30);

(1)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가 랍비의 상상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버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예루살렘 사람 하나가 요단 쪽으로 가기 위하여 동쪽 관문에 해당하는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난 이야기를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10:30a). 예루살렘 사람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기득권층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들입니다. 예루살렘 사람은 요단 강변을 따라서 시리아 쪽으로 여행을 하려고 것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여행경비를 많이 가지고 여리고를 지나서 골짜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때 매복하고 있던 강도 떼를 만나서 보따리를 전부 털리고 심하게 구타를 당한 것입니다.

(2)   강도들은 사람의 옷까지 벗겨서 가지고 갑니다(10:30b). 겉옷을 굉장히 값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을 골짜기 통로 한쪽에 밀어버립니다. 죽도록 매질을 했기 때문에 그냥 두더라도 살아남지를 못할 것입니다(10:30c). 앞으로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누가 사람을 발견하고 돌보며 생명을 살려주고자 할까요? 만약 그렇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을 진실로 하나님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성도일 것입니다. 이웃사랑의 개념이란 본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창조물을 하나님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마침 제사장 길로 내려 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이와 같이 레위인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10:31-32);

(1)   예수님은 유대교지도자들이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성전에는 산헤드린 공회가 있으며 그것이 유대교의 최고재판소이며 의결기관입니다. 공회에는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다수파 사두개인들이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일부 제사장 그리고 장로들이 그들입니다. 다음에는 유대교리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있는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 랍비들의 대표자들입니다. 옛날 왕국시대의 칭호인 서기관이라고 때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유는 종교재판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율법을 적용한 사례 그리고 율법의 해석상의 여러 문제 등을 정리하고 아울러 행정처리까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대표자들이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유대교의 전통을 예수님께서 비판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선민들의 구원과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현세적인 축복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선민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복은 세상에서 선민의 형통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하여 천국에서 함께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회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대표자들이 예수님을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3)   그러한 상황 하에서 예수님께서 비유 가운데 사두개인을 상징하고 있는 제사장 그리고 바리새인을 상징하고 있는 레위인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위기에 처해있는 예루살렘 사람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0:31-32). 어째서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백성의 위기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본문의 비유 가운데에서는 단순하게 여리고 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유대인을 본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4)   그렇지만 40 후에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닥치게 되는 로마군대의 만행을 생각하게 된다면 의미가 심각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외면한 유대인들의 장래가 비유 속의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대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고 유대교리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을 유대교지도자들이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10:33);

(1)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유대인들은 북쪽 사마리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이유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인지는 몰라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여러 주변국의 종족들과 혼혈이 되어 선민의 족보가 사라져버렸으며 더구나 여러 잡족의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를 하나의 우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렇게 천시와 멸시의 대상인 사마리아 사람이 여리고 골짜기를 여행하다가 위난에 처해있는 유대인을 발견합니다(10:33a). 평소의 적대감이 일어나서 사람을 본체하고 그냥 지나갔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사람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무조건 살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여기서 불쌍히 여겨 의미입니다(10:33b).

결론적으로, 좋은 이웃에 대하여 아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복음서의 구절을 소개함으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3-48).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