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03강(눅9:49-5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8. 00:06

누가복음 강해 103(9:49-5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15()

 

동역의 대상과 구원의 대상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9:49-56)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형성이 되었을 때에 성도로 참여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본래 로마제국에 유대교의 움직임에 관하여 수시로 보고하는 자이므로 그의 관심은 유대교지도자들의 동향입니다. 따라서 유대교가 배척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사 누가는 유대교를 알고 있으며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애초부터 나사렛 예수 일행의 주장에 동조할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시작이 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유대교지도자들에게서 배척을 당했으며 로마의 반역자로 처리가 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할 없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2사도로 불리고 있는 예수의 제자들이 목숨을 걸어 놓고서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 유대교인들이 한꺼번에 수천 명씩 기독교로 개종을 하여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합류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2:41, 47, 4:4, 6:7). 어떻게 그와 같은 기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의사 누가는 참으로 이해할 없는 영적인 충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수천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는데 이제 균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인 가운데 일부가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그들의 종교재판소 산헤드린 공회가 이단으로 정죄하여 처형을 있는 나사렛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믿으며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 개종한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압력과 동족인 선민의 핍박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습니다.

의사 누가는 예수의 교훈과 복음사역의 내용이 그러한 환난과 핍박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고자 사람입니다. 방법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참석하여 내용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결과 의사 누가는 자신의 이성적인 사고방식과 논리 그리고 상상력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고 있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세상에 이미 계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피조물을 하나같이 사랑하고 생명을 모두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내용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선민들의 폐쇄적인 선민구원사상과 민족적인 우월사상을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등종교가 강조하고 있는 현세적인 축복사상을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상은 유대교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개방된 것이며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매우 고차원적인 구원의 방법론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의사 누가가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뿌리부터 따지고 증거를 착실하게 수집하여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여 로마의 정책입안자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1:1-4). 가운데 본문의 내용은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폭이 넓은 복음사역을 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따라서 복음사역을 있는 일꾼의 범위를 축소하려고 하는 사도들을 말리고 있습니다(9:49-50). ②둘째,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당장은 배척하고 있는 백성들에 대하여 장차 아버지 하나님께서 한번의 구원의 기회를 주실 것임을 시사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형제를 달래면서 괘씸한 사마리아의 마을을 조용히 떠나시고 있습니다(9:54-56).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본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참고로, 본문의 구절에 대해서는 지난 번의 강해에서 이미 상세하게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구절에 대한 검토를 생략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당대에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보내고 있지 아니한 자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9:49a).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사도 요한처럼 그들의 복음사역을 금해서는(9:49b) 아니되는 것인가요?

(1)   역사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고자 합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가장 심하게 바알 신을 섬긴 왕이 아합입니다. 그는 바알 신을 섬기는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살면서 그의 왕국의 백성들에게 바알 신을 섬기도록 강요한 왕입니다(왕상16:30-33). 그러한 악한 시대에 엘리야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왕상17:1).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서 36개월 동안의 가뭄을 기도로 끝나게 하는 기적을 보이고 있습니다(왕상18:41-46). 그리고 그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도랑의 물을 태우게 되는 역사가 발생합니다(왕상18:36-38). 이에 고무가 백성들이 바알 선지자 450명을 척살하게 됩니다(왕상18:19, 39-40).

(2)   하지만 그것으로 종교개혁이 가능해진 것이 아닙니다. 왕비 이세벨이 군대를 동원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고자 때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엘리야를 숨겨주는 세력이 전혀 없습니다(왕상19:2). 그래서 절망한 엘리야는 남조 유다 왕국으로 도망을 갑니다(왕상19:3). 가나안 남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소원할 때에 여호와께서 가지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엘리야를 제외하더라도 그의 시대에 북조 이스라엘에서 바알 신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는 의인 7,000명을 남겨두신다는 것입니다”(왕상19:18). 중의 사람이 엘리사이며 그는 엘리야의 제자가 되고 있습니다(왕상19:19-21).

(3)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있는 자가 예수님과 자신들 뿐이라고 하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좁은 생각입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지혜와 폭넓은 역사섭리를 모두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엘리야가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자기 사람뿐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너무나 좁은 소견인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같은 의인을 7,000명이나 숨겨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4)   예를 들면, 12사도 이외에 하나님께서는 후속 사도로 바나바와 바울을 준비하십니다(4:36-37, 9:1-19, 11:22-26, 14:3).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초대교회를 섬기는 7집사를 준비하십니다(6:4-6). 뿐만 아니라 의사 누가를 통하여 복음서를 저술하게 하십니다. 나아가서 사도 바울 이외에도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복음사역자 아볼로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18:24-28, 고전3:4-7).

(5)   그러므로 당장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하면서 직접 배우지 아니하고 있다고 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복음의 사역자들을 물리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가 시대에도 나타나며 시대에는 전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으면 영적으로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이 사도들의 고백과 동일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있다고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면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을 선포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9:50).

둘째로, 자신들의 동네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는 마을이 있습니다(9:53b). 예수님을 배척하는 행위가 괘씸하므로 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의견대로 마을에 하늘로부터 불심판이 임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땅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명을 담당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십니다. , 불심판이 능사가 아닌 것입니다. 가능하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할 있는 기회를 한번 주고자 하십니다. 참고로, 성육신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살아가시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선민들이 멸시하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한과 억울함 그리고 보복심리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9:53a).

(2)   그렇다면, 한번의 기회가 언제 제공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게 됩니다(9:22a). 그리고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십니다(9:22b). 훗날의 복음사역을 사도와 제자들에게 위임하시고 승천을 하시게 됩니다(9:51, 28:18-20). 그리하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땅에 오셔서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전개됩니다(24:49, 14:16-17, 2:1-4).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전도와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1:8). 그때가 되면 사마리아 전역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발생하게 것입니다(8:5-8).

(3)   성령님의 역사로 사도와 제자들이 전도와 선교에 나서게 되면 백성들은 가지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영접할 것인가?“. 만약 배척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로 한번 용서를 받을 수가 있지만 성령님의 역사를 배척하게 되면 다시는 용서함이 없기 때문입니다(12:31-32).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서 세상에서 복음사역을 하시고 계십니다. 기본적으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시공간적인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2,000년전이라는 시간적인 제약 그리고 유대 땅과 일대라는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복음사역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로 세상에 그리고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확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시공간적인 확장이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 아니하고 있는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 행위를 금지하려고 하는 사도 요한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유숙과 복음사역을 배척하고 있는 사마리아의 어느 과격한 마을에 대해서도 사도 야고보와 요한이 불심판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를 때에도 그것을 물리치십니다.

  그와 같은 모든 일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의 역사에 맡겨드려야만 합니다. 구속자이며 구원자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하는 그리스도와 제자가 함부로 심판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폭넓은 시선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폭넓은 사고로 신앙생활에 매진하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