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04강(눅9:57-6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10. 02:31

누가복음 강해 104(9:57-6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16()

 

어떠한 각오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야만 하는가?(9:57-62)

 

의사 누가는 본문에서 공생애가 어려운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지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모집하실 때에 하신 말씀과 일화를 본문에서 한꺼번에 다루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의사 누가는 이슈별로 예수님의 교훈과 일화를 묶어서 조직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의 저술가입니다.

의사 누가가 제시하고 있는 번째 이유는 정치권력자들과 악한 세상이 예수님의 제자로 공생애를 살아가고자 하는 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견해를 누가는 상징어를 사용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9:58). ②둘째 이유는 고대사회에서 부모의 3년상을 치르겠다고 하는 관습에 묶이게 되면 공생애를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9:59). ③셋째 이유는 가족에게 먹고 방도를 마련해주고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하면 엄청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9:61).

그와 같은 생각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 굴이 있고 공중의 집이 있으되, 인자 머리 곳이 없도다 하시고”(9:57-58);

(1)   번째의 사례는 자원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경우입니다(9:57). 예수님을 따라 공생애를 함께하겠다고 하므로 얼마나 흡족한 경우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의 속을 먼저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걱정이 앞서고 있습니다(삼상16:7). 제자로 따라 나서겠다고 자원하고 있는 젊은이에게서 세상적인 야심이 엿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당시 유대인 사회 일각에서 나사렛 예수님은 이미 선지자의 경지를 넘어서서 선민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던 메시아로 불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치의 병자와 장애자를 모두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것을 보면(7:15, 8:52-56), 능력이 이미 선지자 엘리야나 엘리사의 경지를 진작에 넘어서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려고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시고 옛날 모세처럼 출애굽의 역사를 실현하실 있을 것으로 일부 유대인들이 전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갈릴리 지역에서 만명 운집한 백성들에게 하늘 곳간을 열어서 먹을 것을 제공해주었다고 합니다(914-17). 정도의 능력이라면 로마의 황제와 총독에게 그리고 헤롯 왕가의 분봉왕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을 내리고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나라를 회복해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4)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메시아의 나라 다윗의 제국이 다시 가나안 땅에 건설이 때에 출세를 하고자 하는 야망을 지니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자 하는 청년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허망한 기대를 버리도록 여기서 찬물을 끼얹고 계십니다; “여우 굴이 있고 공중의 집이 있으되, 인자 머리 곳이 없도다 하시고”(9:58);

1)      뜻을 새겨보자면 여우’(9:58a) 교활한 정치권력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궁에서 부귀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몰아내고 대신 왕궁을 차지하겠다고 하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나서려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2)      공중의 ’(9:58b) 대해서는 씨뿌리는 비유에서 의미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이 공중의 새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8:5, 12). 사탄과 악한 영들이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 공생애를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악한 영들의 방해와 음모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과 환난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 그리고 형통함을 마음껏 누리겠다고 하는 소원을 가지고 공생애를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 세상에서는 머리 곳이 없습니다”(9:58c).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진실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외로운 길입니다. 물론 보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확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상급과 보상이 천국에서 온전히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12:1-2).

둘째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9:59-60);

(1)   번째의 경우는 자원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젊은이를 보시고 자신의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권유하고 있는 경우입니다(9:59a). 그와 같은 제의(일종의 calling out) 받은 청년은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고자 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합세를 하겠다는 것입니다(9:59b).

(2)   정도의 요청이라면 쾌히 양해를 해줄 만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가혹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9:60). 어째서 그러한 답변을 하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가지의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육신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영생의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손에 맡겨드리고 너는 영혼이 죽은 자들을 세상에서 구원하여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친상을 당하고 있는 젊은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단호하게 결심을 하기가 힘이 듭니다. 세상에서 부친을 여의고 슬픔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로써도 위로가 되지를 않습니다. 유일한 위로는 부활의 주님을 믿고서 손에 돌아가신 부친의 영혼을 맡겨드리는 것인데 그것을 아직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청년입니다.

2)      둘째, 옛날 한국에서 그러하였듯이 고대 중동사회에서도 지도계층에서는 부모상에 대해서는 3 상을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의 젊은이는 집안이 지도계급에 속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권유한 것을 보면 좋은 환경에서 학문을 익힌 쓸모가 있는 젊은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년상을 치르고 비로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게 되면 늦어집니다. 그때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 승천하신 후가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61-62);

(1)   가장 보편적인 변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공생애를 살아가고 싶지만 가족걱정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젊은이는 가족들에게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준 다음에 좋은 작별을 하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사람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전도와 선교여행을 함께하는 완전한 공생애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족과 집안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2)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족들을 위하여 완전한 경제적인 여건과 토대를 마련해준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있으며 너무나 자본면에서 조직화가 되어 있어서 개천에서 용이 나도 별로 신분상승이 되지 아니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느 정도 멀고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고 하더라도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라는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기를 펴고서 자녀들이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신분사회인 고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3)   그러므로 가족과 자녀들의 앞길을 개척해주고서 남은 여생을 주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만시지탄의 후회를 남기게 됩니다. 더구나 그것은 불신앙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의 앞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 부모이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인생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아니하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따가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62).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며 공생애를 기꺼이 함께 살아갈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하는 의식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만약에 하나님의 종이며 자신의 인생과 가족들의 인생을 창조주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하는 믿음이 확실하다면 기쁘게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에 응하여 따라 나서며 공생애를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엿볼 있는 바와 같이 공생애를 살아감으로써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왕과 같은 권세를 휘두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생구원이라는 복음의 뜻을 애초부터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상급과 기업을 땅의 것으로 미리 바꾸어 버리겠다고 하는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계산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생명의 주인이시며 인생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도우심만을 바라보면서 영혼구원과 하나님나라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나가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깨달음으로 전진하시는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