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02강(눅9:51-5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8. 00:05

누가복음 강해 102(9:51-5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14(주일)

 

동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의 마을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직행하시려는 예수님의 행보를 어째서 싫어하고 있는가?(9:51-56)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크게 보아 갈래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그냥 내륙으로 남하하여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② 하나는 요단 강변 길을 따라 남하하여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자 내륙 길을 따라서 남하를 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에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혼혈아라고 멸시를 받으며 유대교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슬픈 역사의 후손들이 주로 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옛날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들이며 이미 사라진 이스라엘 10지파의 자손들입니다. 주전 722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 살고 있던 만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부분 패권국 앗수르 제국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앗수르 제국은 변방에 살고 있던 잡족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여 보냈습니다(왕하17:24). 그리고 사마리아 땅에서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과 여러 잡족들이 혼인을 하도록 장려했습니다. 또한 여러 잡족의 우상들을 들여보내어 섬기게 하면서 여호와를 우상 가운데 하나로 만들고 말았습니다(왕하17:33). 그와 같은 앗수르 제국의 정책은 선민의 나라라고 자신들을 멸시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한없이 괘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지도상에서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것입니다.

흔히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정복군의 씨를 잉태하여 많은 혼혈아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정복자들이 물러가고 나면 피해를 입은 당사국의 백성들이 혼혈아들과 어미들을 향하여 얼마나 욕을 하고 분풀이를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세계사가 그러한데 옛날 고대시대 그것도 피의 순수성과 종교적인 순수성을 엄청 강조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시각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러한 흔적을 요한복음 4장과 본문의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요한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 세겜 근처에 있는 수가 마을에 들러 현지인 여인으로부터 우물물을 얻어 마시려고 하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뼈가 있는 마디를 예수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4:9a). 다음에는 상세한 설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4:9b).

(2)   둘째, 누가복음 9 본문에서는 사마리아의 마을에서 예수님 일행이 머무시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9:53b);

1)      이유는 예수님 일행이 그곳을 거쳐서 남하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9:53a). 그곳의 주민들은 오랜 세월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땅의 사람들로부터 천대와 멸시 그리고 조롱을 받다가 보니까 그만 자신들도 모르게 반작용으로 억하심정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마을에 머무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고 것입니다.

2)      참으로 불행한 역사적인 상처입니다. 그렇지만 성격이 급하고 젊은 피가 뜨거운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마을을 아예 태워버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예수님께 건의를 하고 있습니다(9:54).

3)      예수님께서는 사도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사마리아 촌락의 백성들을 모두 불쌍하게 생각하십니다. 따라서 사도를 꾸짖으시고 조용히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9:55-56).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 차가매 예루살렘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의 마을 들어갔더니”(9:51-52);

(1)   예수님에게는 가지 종류의 사역이 있습니다; ①하나는 땅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행하시는 공생애 동안의 복음사역입니다. ② 하나는 부활의 몸을 입고 승천하여 하늘에서 행하시는 대제사장의 직무입니다(4:14-16). 가운데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땅에서의 공생애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 차가매”(9:51a).

(2)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 자신의 공생애를 끝내시게 되는 것일까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9:51b).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하여 갈릴리 지역을 떠나고 계십니다. 그런데 길을 가시는 걸음이 범상하지가 않습니다. 굳은 결심을 하고서 남하를 하시고 있습니다(9:51c).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복음사역을 하시고 나면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체포를 당하시고 처형에 넘겨지게 되는 고난의 일정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9:22).

(3)   예수님께서 남하하기 위하여 선택하고 있는 코스는 요단 강변을 따라가는 길이 아닙니다. 대신에 갈릴리에서 그대로 남하하여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십니다. 이유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하고자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처럼 일부 사도들을 먼저 파송하십니다(9:52a). 그들이 앞서 가서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전개하고자 마을에 들리신다는 소식을 전하고 유숙할 처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9:52b).

둘째로,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9:53);

(1)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가시는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유대 땅과 예루살렘이라고 답변을 해줍니다. 그러자 마을의 주민들이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치유사역을 해주려고 한다면(9:53a) 자신들의 마을에서 유숙을 하면서 복음사역을 실시할 수가 없다고 하는 강경한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   어째서 사마리아 마을의 사람들이 그토록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선민들을 싫어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오랜 세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유일한 선민이라고 자랑하면서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피를 섞고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타락한 족속들이라고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때와 반대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갈릴리로 가고자 때에는 빠른 직선거리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내륙길을 이용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사마리아를 동쪽으로 우회하여 요단 강변 길을 따라서 가고 오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3)   그렇게 차별과 멸시를 받다가 보니까 사마리아의 마을에는 부류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유대인 길손에게 유숙할 있는 집을 제공하지 아니하는 과격한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② 하나는 반대로 온건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입니다. 그들은 그래도 나그네를 대접하고자 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10:33-37). 예수님의 사도들은 지금 전자 과격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냉대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9:53b).

셋째로,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9:54);

(1)   뒤를 이어 예수님께서 마을에 도착하십니다. 먼저 사도들이 유숙할 집을 전혀 구해 놓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있는데 낭패입니다. 그래서 화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과격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러한 마을에는 불심판이 임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입니다(9:54). 그들의 별명 우뢰의 아들 어울리는 발언입니다(3:17).

(2)   마을 사람들도 불치의 병자와 장애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식을 진작에 듣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병자와 장애자들 그리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지간하면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고 치유사역을 행하시도록 선처를 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선민 유대인들에게 복음사역을 행하시겠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게 수가 없습니다. 지난 700년간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선민들에게 받아온 설움과 모멸감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넷째로,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9:55-56);

(1)   그와 같은 마을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예수님께서 훤히 짐작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훗날에는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이 구속자이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마음의 씀씀이입니다. 따라서 불심판 운운하면서 과격한 발언을 하고 있는 야고보 형제에게 꾸중을 하십니다(9:55). 그리고 힘들더라도 이웃마을을 찾아서 가자고 권유하십니다(9:56).

(2)   여기서 하나 짐작할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일찍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언급을 바와 같이,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하나님이 계십니다(24:3). 하늘의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이시라면 땅의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계획은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우시지만 그것을 땅에 성육신하셔서 실천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로부터 구속과 구원의 결과를 보고 받으시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인정사정이 없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땅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사람들의 어려움을 체휼하고 계시는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딱한 심적인 상태를 이해하십니다”.

(3)   결과 예수님은 그들에게 훗날 구원의 기회를 주고자 하십니다. 일을 위해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보혜사 성령님을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보내어 주시고(14:16-17) 대대적인 복음사역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1:8). 그렇게 장차 사마리아 마을에도 복음이 전해지고 초대교회가 개척이 것입니다.

(4)   만약 그때에 가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에는 성령님께서 마을의 주민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1-32).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간의 어려움과 미묘한 심정을 이해하시고 스스로 체험하셨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은혜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형편을 아시기 때문에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우리들의 변호사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배척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아직 한번의 용서함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께서 강림하셔서 대대적인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때에는 빨리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성령님께서 교회를 개척하시고 전도와 선교의 문을 크게 여시는 그때에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선택의 순간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복음을 듣게 되는 순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순간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속자이며 구원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3:20). 다시 기회가 있는 여기고서 매몰차게 배척을 하게 되면 그야 말로 불심판을 의미하는 영벌에 처해지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올바른 영생구원의 선택을 있는 인생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