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100강(눅9:43-4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8월 12일(금)
귀신에 대해서는 심판주 하나님의 위엄으로,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구속자 그리스도의 긍휼로 대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눅9:43-48)
의사 누가는 헬몬 산 남쪽 기슭의 어느 마을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눅9:37-43). 그러면서 본문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아주 웅변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눅9:43-48). 그 내용은 한 마디로, 귀신을 아이에게서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위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눅9:43). 그 반면에 어린아이 하나까지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위엄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처형까지 당하시게 되는 수치와 모욕을 기꺼이 감수하신다는 것입니다(눅9:44-48).
당시 사도들과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 의미는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위엄으로 가차없이 축사(逐邪, 사악한 영을 쫓아냄)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어린아이 하나까지 모두 구원하며 또한 이방인까지 전부 구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삼아 유월절 어린양으로(요1:29) 속죄의 제사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면 안되는 예수님이십니다.
요컨대,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 가두어 두고자 하는 악한 영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심판하고 쫓아내는 한편, 예수님께서는 무한하신 긍휼의 마음으로 어린아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속하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심판주와 구속자라는 두 가지 상이한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그 점에 유의하면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눅9:43-44);
(1) 귀신들린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원한 것은 예수님께서 잠시 신(神, god)의 힘을 빌려서 마치 무당이 굿을 하여 귀신을 쫓아내듯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신의 힘을 빌린 것 같지가 않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위엄으로 귀신에게 명령을 하시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악한 영을 쫓아내어 버리신 것입니다(눅9:42-43a).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일개 무당이 아니라 그 이상의 능력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닌가 하여 놀라고 있습니다(눅9:43b).
(2) 제자들도 백성들과 비슷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 얼른 다른 이야기를 예언으로 들려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눅9:43c-44). 하나님의 위엄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어째서 그렇게 허약한 말씀을 예언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그 의도를 모르고 어리둥절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 하더라”(눅9:45);
(1) 한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 장면에 가슴이 들뜨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찬물을 끼얹고 계십니다. 귀신까지 쫓아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소유자께서 한갓 미물과 같은 사람들에게 체포를 당하시고 그 심판을 받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눅9:44).
(2)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예언의 말씀입니다(눅9:45a). 그러한 일을 당하시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만민의 대속을 위해서는 어떠한 속죄의 제물이 필요한지 한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십자가의 희생에 대해서는 그들 제자들에게도 일종의 신비이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대외비(對外秘, 외부에 대해서는 비밀사항임)입니다(눅9:45b).
(3) 더구나 제자들은 감히 예수님께 어째서 그렇게 나약한 인간들에게 붙잡혀서 처형을 당하시게 되는지 그 이유를 물어 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눅9:45c). 만약 그렇게 묻게 된다면, 그것은 “제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 비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용감하게 질문을 해보았더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더라면 어린아이까지 그리고 이방인까지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속전(贖錢, 해방시키는 몸값)을 어떠한 방식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지불하게 되는지 그 비밀을 그 자리에서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눅9:46);
(1) 하나님의 위엄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광경을 보고서 사도와 제자들의 가슴이 벅차 오르고 있습니다. 자신들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던 이두래 사람들의 심정도 그러합니다. 수백 년간 간구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하나님의 메시아가 그 자리에 임재한 것으로 그들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며 지금부터 선민들의 힘을 모아 외세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선포하시기만 하면 모두가 호응을 할 것만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이스라엘 제국 그 메시아의 나라가 건설이 되면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 벌써부터 제각각 조각(組閣, 내각을 조직함)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복음사역에 있어서 더 헌신적이고 공이 더 크다고 은근히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눅9:46a).
(3) 예수님께서 사도와 제자들의 마음속을 벌써 들여다보고 계십니다(눅9:46b). 참으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그들이 서로 스승님의 마음이 자기를 신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소위 ‘예심의 향방’이라고 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의 마음은 한결같이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도와 제자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그 정도로 열심이었다면 그와 같은 헛된 ‘도토리 키재기’형식의 논공행상(論功行賞, 공로를 따져서 상을 베푸는 것)에 빠져들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차제에 사도와 제자들에게 하나의 큰 교훈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 방법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눅9:46c)입니다. 도대체 어린아이를 그 곁에 세우시고 어떠한 교훈의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심판주로 서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구원자로 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고 하는 진리를 제자들이 깨닫도록 도와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9:48);
(1) 고대 유대인사회에서 남자는 20세가 되면 성인 취급을 받으며 장정으로서 군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25세가 되면 독자적인 직업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30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회이므로 어린아이는 독자적으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히 서열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속하고 있습니다.
(2) 그러한 사회에 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어린아이를 자기 곁에 세우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눅9:48a)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의미는 그러한 어린아이를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일을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자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사람들까지 모두 구원하겠다고 하는 열심을 품어야만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3) 어린아이까지 하찮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대신 돌보라고 자신에게 보내어 주신 자라고 여기는 것이 제자의 도리라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는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어린아이까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7-39).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복음사역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이며 여호와의 종으로 인정함을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눅9:48b)
(4) 어린아이 하나까지 모두 구속하고 구원하고자 이 세상에 오신 유월절 어린양이 바로 대속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1:29).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처럼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9:48c);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 마음대로 폼 나게 행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 종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줄줄이 따라다니도록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사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회에서 사람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자들 그 모두의 사정을 헤아리고 구원할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만 합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종이 자신을 낮추어서 복음사역에 전념하고 있는지 그것을 눈여겨보시는 참으로 눈이 밝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두려우신 하나님의 위엄과 그 능력을 빌리고 계십니다. 악한 영을 추방하는데 있어서는 사정을 두지를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귀신들린 자를 구원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어두움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악한 영의 하수인들이므로 척결의 대상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악한 영들을 척결함에 있어서는 추상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는 한편 사회에서 어려움에 처한 약자를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긍휼을 베푸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신앙인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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