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84강(눅8:22-2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2. 18. 16:03

누가복음 강해 84(8:22-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7 27()

 

광풍노도(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 가운데서 누구를 믿고서 편히 잠을 이룰 있을 것인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에 대하여(8:22-25);

 

본문과 관련하여 먼저 마태복음의 구절을 음미해보고자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첫째,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라는 것이 번째 관문입니다. 둘째,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대로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 번째 관문입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뜻을 깨달아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시선이 아버지 하나님께 정조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자주 시선을 엉뚱한 곳에 맞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가 갑자기 발생한 광풍노도로 인하여 뒤집힐 것만 같아지자 그들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도 못하고 시선을 그곳에 두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기에 급급할 따름입니다.

광경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창조주의 존재성과 보살핌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그들에 대하여 한심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육신적인 삶을 지탱하게 해주고 있는 그들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호소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순간 예수님은 신의 저주를 잠재워줄 있는 능력이 많은 무당과 같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본질은 우상문화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서 광풍노도 가운데에서도 편히 일엽편주( 바다에 있는 나뭇잎과 같은 작은 )에서 잠을 이루시고 계시는데 그러한 믿음을 제자들에게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비극입니다.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가지를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인생살이 자체를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고서 공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이 모두 아버지의 뜻입니다. 자신에게 맡기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성취시키시는 것도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일을 세상에서 이루시기 위해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깃밥이 되도록 만들지는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위험이 발생해도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서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2)   둘째,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보살핌 그리고 보호하심은 너무나 멀리 있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믿고 의지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나면 그만인데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당장 눈에 보이는 힘과 능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승이신 예수님이 복음사역을 통하여 자신들과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이 바로 살길이며 구원의 방책입니다.

위와 같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8:22-23);

(1)   여기서 하루는’(8:22a)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행하시던 그때의 어느날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글을 작성하고 있는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옛날 갈릴리 복음사역의 경험담을  듣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서 하루는이라고 시작이 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고자 하십니다(8:22b). 이유는 가지입니다; 첫째, 한쪽에서의 복음사역이 대충 끝났으므로 이제는 호수 반대쪽으로 사역의 현장을 옮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모인 무리들이 계속 따라다니는 것을 빨리 피하시기 위함입니다. 조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평소 많은 무리들을 호수가 평지에 모아놓고 예수님은 주로 배에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안수기도를 하시고 질병과 약함을 고쳐주십니다. 일이 끝나시면 다시 배에 올라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십니다. 이유는 평지로 진행하시게 되면 무리들이 흩어지지를 아니하고 계속 예수님 일행을 따라나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십니다.

2)      그러한 조치를 예수님께서 취하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여 세상적인 조직과 무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세상의 제국을 건설하는 방법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손에는 하나님말씀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서 복음사역을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26:52).

3)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고 그것으로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세상에 천국을 쉽게 만들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집단들이 더러 있습니다(26:52, 4:5-7).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천국을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4: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재빨리 배를 타고서 건너편으로 가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4)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이 스스로 복음사역의 대상지역을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역지를 결정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만민구원을 위하여 되도록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사역을 행하라고 하시는데 명령을 따르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5)      비록 자신에게 당장의 사역지가 익숙하며 편하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임의로 뼈를 묻어서는 안됩니다. 목자장이시며 자신의 주인이시고 사역의 발령자가 되시는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을 제대로 읽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라고 하는 것은 임지를 옮기는 일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다른 곳에서도 사역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3)   하루 종일 갈릴리 호수가에서 복음사역을 하신 예수님께서 피곤하여 뱃전에서 잠이 드셨습니다(8:23a). 그러자 광풍이 일어나고 파도가 뱃전을 때립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배에 물이 많이 차게 됩니다. 배가 바람에 흔들리고 이제는 호수에 빠져버릴 것만 같습니다(8:23b). 위기를 느낀 제자들이 급히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결과 제자들은 놀라운 현상을 경험하게 되고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얻게 됩니다(8:24-25). 우선 여기서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 뱃전에서 잠이 드시자 광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시고 있습니다(1:14). 그러므로 광풍이 함부로 앞에서 불어재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루일과를 끝내시고 지쳐서 잠이 드셨습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서 광풍이 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이해가 어렵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깨어나시면 야단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그때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전에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었다고 있습니다(1:12, 2:6, 4:1-2).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떠보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2)      둘째, 어째서 제자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아니하고 예수님부터 찾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환난과 풍파 가운데서 누구를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정답은 생명을 주시고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맡기신 일을 실천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믿음과 삶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고 직접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시고 계시는 분이 바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 여전히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차제에 갈릴리 호수에서 믿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을 해보도록 광풍으로 시험을 하시고 있습니다. 과연 제자들은 관문을 통과할 수가 있을까요?

둘째로,제자들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8:24);

(1)   호수 가운데서 광풍으로 말미암아 배가 뒤집혀질 것만 같아지자 제자들은 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배안에 물이 많이 차오르게 되자 크게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고자 합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빨리 일어나 살려주십시오)”(8:24a).

(2)   예수님께서는 잠이 깨시자 마자 상황판단을 하십니다. 우선 제자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따라서 다짜고짜 자연을 향하여 꾸중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8:24b);

1)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무모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서 그것을 잠잠하게 만들어버린 경우를 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는 본래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은 결코 자연보다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일부 자연을 개조하고 이용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경우입니다. 광풍과 파도를 잠재울 있는 능력은 21세기 강대국의 경우에도 없습니다.

2)      그런데 그러한 절대적인 능력이 2,000 나사렛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온갖 질병과 장애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현장에서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자연을 다스리시는 스승 예수님의 능력은 처음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바람과 물결만 잠잠해진 것이 아닙니다. 동안 죽는다고 떠들던 제자들의 입이 다음 순간 일제히 자리에서 얼어붙고 있습니다(8:24b).

셋째로,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8:25);

(1)   일단 광풍과 노도를 꾸짖어 잠재우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야단치십니다. 어째서 곤히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을 깨웠느냐고 하는 꾸중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지 아니하고 사람인 예수님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매어달린 제자들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8:25a).

(2)   앞으로는 사람을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아가서 스승이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도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로지 사람을 구원하고 살리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계시는 절대적인 능력자 창조주 하나님만을  생명의 아버지로 의지하고 선하심과 보호하심을 믿으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이유는 자신의 부활도 제자들의 부활도 그리고 사함과 영생의 은혜도 모두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궁극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새로이 창조해주시는 것입니다(65:17-25, 21:1-8).

(3)   그런데 예수님의 말뜻을 제자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스승이신 예수님의 마디 호령에 기이하게도 광풍과 노도가 잠잠해진 것만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믿음의 본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놓쳐버리고 서로 수군대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8:25b).

결론적으로, 목숨의 유지에 너무나 급급하고 있는 인생살이들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고 육신을 보전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이 다하고 의식이 육신을 떠나게 되면 마치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린다고 사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영생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영혼을 보호하며 새로운 영적인 삶을 살게 해주신다고 하는 믿음은 어디로 실종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게 된다고 하는 미래를 믿고나 있는 것일까요?

사실 세상의 풍파가 질풍노도와 같습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육신과 사회는 마치 일엽편주와 같이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배가 뒤집혀버리고 자신은 미친바람 거친파도에 휩싸여버릴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을 깨워서라도 위기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마음은 마치 무당을 깨워서 우상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자들과 백성들의 신앙심이 참으로 영적으로는 눈뜬 소경과 같습니다(6:9-10).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중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8:25a).

꾸중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의 반석을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두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역사 가운데 광풍과 노도를 눈앞에서 잠잠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신기하게 계속 쳐다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8:25b). 그러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전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섭리와 구원하심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시간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