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80강(눅8:4-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2. 11. 20:47

누가복음 강해 80(8:4-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7 23()

 

의사 누가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뿌리는 비유에 대하여(8:4-8, 13:1-9, 4:1-9);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기록의 연대가 다릅니다. 마가복음에 이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주후 60년대 전반기에 세상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에 의하여 소아시아에서 기록이 4복음서는 주후 90년대 초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주후 30년대 전반기에 시작이 초대 예루살렘교회와(2:41-47) 후반기에 시작된 초대 안디옥교회가(11:19-26)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얼마나 환난과 핍박을 당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 소위 뿌리는 비유 강조하신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의 정치적 종교적 압력으로 말미암아 복음사역이 힘이 들었는데 일이 초대교회시대에도 계속이 것입니다.

반면에 주후 70년대와 80년대를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경험은 조금 다릅니다. 그와 같은 초창기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초토화가 되자 유대교의 조직적인 간섭과 압력이 거의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소아시아와 헬라 그리고 로마에 초대교회들이 든든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문제는 어떻게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뿌리는 비유보다는 예수님 말씀의 풍성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과감하게 대목을 생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말씀하신 뿌리는 비유 복음의 씨를 뿌린다고 하더라도 열매를 얻을 있는 확률이 25%정도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뜻을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무리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 떨어지매, 밟히, 공중의 새들 먹어버렸고”(8:4-5);

(1)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계속하여 군중집회를 통하여 복음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마침 갈릴리 호안가 제법 성읍에 자리를 잡고서(13:1-2, 4:1-2) 사방의 인근 마을에 12사도와 여러 제자들을 파송한 결과 많은 무리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8:4a). 그러자 예수님은 동네에서 몰려든 군중들에게 천국의 말씀을 전하고 치유사역을 하십니다. 도중에 본문에서와 같이 뿌리는 자의 비유 말씀하시기를 시작하십니다(8:4b).

(2)   어째서 그와 같은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시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많은 무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선포하지만(8:5a) 말씀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고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결단하고 실천하는 자가 생각보다 적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가지 경우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비유로써 알기 쉽게 말씀하십니다(8:5b-8).

(3)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씀 따로, 행동 따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어떠한 환경 가운데 복음의 말씀이 떨어지고 있는가 하는 비유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번째의 비유가 바로 복음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진 경우입니다(8:5b). 경우에는 복음의 말씀이 마음 속에서 움이 트지도 못하고 자라나게 되지도 못합니다. 이유는 다음의 가지 요인 때문입니다;

1)      첫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8:5c).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상이 유대교리를 해치고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종교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일환으로 유대교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서기관과 랍비 바리새인들을 파견하여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꼬투리를 잡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5:17, 21, 30, 33, 6:2, 11).

2)      따지고 보면, 유대교지도자들은 그들의 유대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의 주의주장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민의 특권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선민이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사함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살아가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6:27-38). 그리고 선민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 누리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것은 일종의 우상문화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의 뜻대로 실천하고 있는 종들은 상급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6:22-23).

3)      둘째, 공중의 새가 와서 먹어치우기 때문입니다(8:5d). 새가 날아와서 씨앗을 먹어버리듯이 그렇게 악한 영들이 하늘에서 나타나서 땅위의 사람들에게 뿌려지고 있는 복음의 씨앗을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이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악한 영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을 받아 들이게 되면 죄와 사망의 어두움이 사람들을 이상 지배할 수가 없게 됩니다(1:5, 3:19-21). 그것은 악한 영들의 영토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력을 다하여 예수님의 복음에 저항을 하고자 합니다.

4)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영적인 전투는 교묘하면서도 치열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버리고 자신들의 세상적인 지혜와 방법을 따르게 되면 당장 눈에 띄는 혜택이 주어진다고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4:5-7). 선전에 그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이 술술 풀려나가면서 소원성취와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성공을 얼마나 자랑하고 즐기게 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므로 결국은 넘어지고 쓰러지고 맙니다. 따라서 그러한 성공과 성장의 끝이 자신의 영적인 생명을 해치고 마침내 세상적으로도 허망한 종착역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44:9, 12:31).

둘째로,더러는 바위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8:6);

(1)   바위에는 흙이 얇게 덮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씨앗이 위에 뿌려지더라도 싹이 수는 있지만 깊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흙이 부족한 경우에는 수경재배’(hydroponic cultivation)에서 있듯이 습기라도 충분히 제공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습기마저도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발아가 되지만 식물은 말라서 죽게 됩니다.

(2)   식물이 자랄 있는 좋은 땅을 흔히 표토’(top soil)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포토층에 비가 내리고 빗물이 스며들게 되면 흙이 부드러워지고 공기가 통하게 됩니다. 그곳에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발아를 하고 자라게 됩니다. 공기와 물을 충분히 함유하고 있는 좋은 흙이 이미 형성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그러한 표토가 되지 못하고 있는 지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위입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비가 내리더라도 그것을 흡수하지를 못하고 모두 흘려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위에 내리더라도 그것을 고맙게 여기지 아니하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주의 은혜를 모르고 치유와 회복의 복음까지 무시하고서 살아가고 있는 배은망덕한 자는 마치 바위와 같이 완악한 자라고 하겠습니다(8:6).

셋째로,더러는 가시떨기 떨어지매, 가시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8:7);

(1)   가시떨기 속에서는 도저히 다른 식물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곳에 식물을 재배하려고 접근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시떨기를 완전히 제거하지 아니하면 농사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가시떨기를 제거하고자 하면 단단히 무장을 하고서 접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가시에 찔려서 상처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가시떨기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첫째, 가시떨기는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영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창조주의 영광으로 세상에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이성으로 이해되거나 설명이 되지 아니하면 모두 신화로 처리하고 맙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것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므로 학문의 대상이 되지를 못하고 경험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과학지상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이성적인 종교나 사상만이 기승을 부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창조주는 존재성과 역사섭리가 현실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지 아니하므로 고려의 대상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둘째, 가시떨기는 우상문화가 하나님경외사상을 이기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세상적으로 똑똑한 인간은 신의 도우심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성적인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고 지배자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의 하나로서 인간의 세상지배에 도움을 주고 있는 충실한 종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같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고 전적인 도움만을 주고 있는 그렇게 말을 듣는 하나님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수호신이며 우상입니다. 그것은 마디로, 도구주의적인 신관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더러는 좋은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 하였느니라.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있는 들을지어다”(8:8);

(1)   백배의 결실이라고 하는 것은 최대치의 결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약속의 아들 이삭이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백배의 수확을 거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땅에서 농사하여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26:12-14).

(2)   이삭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블레셋 족속이 살고 있는 그랄 땅으로 이주를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20:7, 26:2-5). 그에게 하나님께서 백배의 결실을 주신 것은 이방 땅의 원주민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주기 위함입니다(26:12-14).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이며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자 하는 자에게 백배의 결실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입니다(8:8a). 그러한 자는 예수님의 뿌리는 자의 비유 참조하면, 가지 경우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씨가 떨어져서 열매를 맺는 경우는 4분의 1 확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이 복음을 듣고 백성들이 실천의 열매를 맺기가 힘든 이유는 첫째, 유대교지도자들의 방해공작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상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의 심성이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혀서 자신들도 모르게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사실을 깨달을 있는 귀를 가지라고 예수님께서 권면하시고 있습니다(8:8b).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도 영적전투에 임하는 성도들의 영적무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6:10-20). 그러므로 아무쪼록 영적인 눈과 귀를 가지고서 세상을 이기고 악한 영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