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71강(눅7:21-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7월 14일(목)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을 보고서 실족하는 자와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눅7:21-23)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소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종류입니다; ①하나는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인 꿈을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성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육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어두움에 갇혀서 살고 있는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은 후자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옥중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은 전자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종류의 소원은 어떻게 성취가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이 들고 장애를 지니게 되면 그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있게 되면 영원한 내세를 희구하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누구나 가장 먼저 창조주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소원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또 하나의 소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메시아에게 걸고 있는 기대와 같은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메시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로마제국과 헤롯왕가의 지배라고 하는 이민족의 족쇄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묘합니다. 그 말씀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7:23)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의 소원을 들어주지 아니하겠다고 하는 의사로 비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복음사역에 있어서 진실로 세례 요한의 소원을 배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역사적으로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악한 지배구조를 영속화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패망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는 선후가 있으며 완전한 해법을 위해서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제약적인 인생과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실을 깜빡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실족’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질문에 유의하면서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마침 그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악한 귀신)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들을 보게 하신지라”(눅7:21);
(1)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어주시는 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복음사역에 무척 바쁘십니다(눅7:21, 요6:37-40). 그 가운데에는 아직 세례 요한이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외세의 척결이 들어 있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은 어째서 그의 사역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서 지금 갈릴리의 분봉왕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세례 요한부터 구출해내려고 하지를 않을까요? 그리고 만약에 그의 사역의 순서를 바꾸어서 예수님이 우선적으로 외세부터 물리치고 세례 요한을 구해내게 되면 장차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게 될까요?
(2)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의 순서를 자의적(자신의 의지로 고의로)으로 바꾸시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시종일관(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변함이 없는 것)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복음사역의 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그 우선순위를 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결정해주시는 그 순서를 따라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요6:38). 왜 그러한 순서를 전적으로 따르고 계시는 것일까요?
(3) 그 이유는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하더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종입니다(사53:2-12). 그 육신을 입은 상태로서는 완전하게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꺼번에 통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선민과 이방인의 처지를 동시에 감찰하고 모두를 한꺼번에 살리는 해법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4) 오로지 그 일이 가능하신 분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지시하시는 그 일만을 수행하십니다. 그것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만약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지 아니하고 계시는데 자신이 앞장을 서서 헤롯 왕가를 붕괴시키고 세례 요한을 감옥에서 구출해낸다고 한다면 그 과정 중에 많은 자들이 상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그들도 모두 구원의 대상들인데 희생이 너무나 큽니다.
(5)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인(signal)과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 일은 예수님 자신이 손을 대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신의 생각과 소원을 접고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만을 최우선적으로 그리고 전폭적으로 수행하며 실천하는 자가 바로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나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도 그리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판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흐트러뜨려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 옛날 리브가와 야곱이 공모하여 벌인 비극적인 합작 사기극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창27:13-41).
둘째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1)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이 세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세례 요한에게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 말씀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으로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를 아버지 하나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영적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다는 내용입니다. ②둘째, 치유사역입니다. 백성들의 온갖 질병과 장애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③셋째,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사61:2, 눅4:19).
(2)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말씀사역과 치유사역을 수행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역이 또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자신의 공생애 끝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몸으로 완전한 대속의 제사를 드려주는 것입니다(히7:27-28). 그리하면, 장차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그 뒤를 사도와 제자들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마27:51-53, 고전15:8, 20-24). 그리고 살아 생전에도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함께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눅24:49, 행1:8, 2:1-4).
(3) 참고로, 그와 같은 사역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때로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바가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진 전신마비의 중풍병자와 그 친지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희들이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눅5:19-20). 그리고 얼마 전에는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장례과정에서 되살려내시는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눅711-17). 그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큰 은혜의 예표 곧 맛보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셋째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7:23);
(1) 본문과 그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2) 지금 가버나움의 감옥에 수감이 되어 있는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외세 헤롯왕가를 당장 물리치고 자신을 감옥에서 구출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왕가를 물리치고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켜주는 데서 만민구원의 시대를 열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십니다. 한 마디로, 세례 요한의 생각은 하나님신앙에서 실족하는 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눅7:23).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지금의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고 계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기적인 선민만의 구원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만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외세로부터 구원해주어 보아야 하나님의 뜻을 전폭적으로 따르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선민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말씀의 뜻을 깨달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죄 사함과 구속의 역사가 있어야만 그 다음에 성령님을 임재시켜서 그들을 만민구원의 일꾼으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런데 그와 같은 순서와 절차를 무시한 채 세례 요한의 주장처럼 먼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부터 물리치고 그 옛날의 출애굽의 역사를 다시 발생시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광야생활 40년이 다시 요청이 될 따름입니다.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사회적인 악을 일소한다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구호로서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외생적인 환경적 요인을 개선하고 혁명적으로 변혁시켜보아야 사람들의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변화시키지 아니하는 이상 다시 그 옛날로 되돌아가버리고 맙니다. 다만 지배계급만이 바뀌어져 있을 따름입니다.
예를 들면, 20세기 초 러시아혁명의 결과가 그러합니다. 10월 혁명으로 엄청난 피를 흘렸지만 그 결과는 또다른 계급이 구 귀족을 대신하여 새로운 귀족으로 탄생했을 뿐입니다. 소위 ‘노멘크라투라’라고 하는 당간부들의 명단에 올라 있는 자들이 신흥귀족으로서 구 소련의 독재정권을 이끌어가며 오랜세월 정치적인 권력을 향유한 것입니다.
요컨대, 정치적인 비판과 경쟁적인 대안체제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기에 붉은 피는 헛되이 흘린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인간의 역사를 이미 모두 알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그저 하나님이 시키시는 복음사역만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부디 사회적인 큰 변혁이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이 본문에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7:23)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근본적이고도 완전한 처방을 제시하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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