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72강(눅7:24-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2. 7. 17:08

누가복음 강해 72(7:24-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7 15()

 

세례요한의 경우를 가지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행과  금욕 그리고 경건생활 가운데 무엇을 추구해야만 하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시다(7:24-26).

 

세례 요한에 관하여 증거를 수집한 있는 의사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 있으니라”(1:80). 사도 마태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요한은 낙타털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때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 받더니”(3:1-6).

세례 요한의 출현에 대한 증언을 종합해보면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외치기 전에 마치 엣세네 파의 사람들처럼 광야에서 고행과 금욕 그리고 경건생활을 영위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메시아를 영접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준비는 먼저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3)   셋째, 세례 요한의 외침은 700 전에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40:3-5).

위와 같이 종합한 내용을 다시 분석해보면, 세례 요한이 자신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히브리정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뜻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이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메시아의 앞길을 구체적으로 예비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때가 되자 유대 광야에서 요단 강가의 마을로 나아와서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예언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지 사실이 중요합니다; 첫째, 세상의 모든 높고 낮은 기존의 질서와 체제가 평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민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까지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예언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영광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 영생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에 따르게 되면, 메시아는 선민만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모든 육체 만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고 여호와 앞에 세우게 되는 복음사역을 하시게 됩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에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8:2).

분명히 세례 요한의 처음의 사역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의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세례 요한이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사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여 외세를 빨리 물리쳐주면 자신이 감옥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땅에 떨치고 싶다는 것입니다(7:19-20).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옥중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의 질문과 관련하여 과연 광야생활의 금욕과 경건을 통하여 무엇을 깨닫고 있는가를 되묻고 계십니다. 고행의 결과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의미를 깨달았으면 천국으로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대속의 삶을 살아가시게 되는 메시아를 돕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을 하여야 터인데 중도에서 목적이 달라지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본문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이제부터 구절씩 살펴보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요한이 보낸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7:24);

(1)   세례 요한의 옥중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이 깊이 생각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구속자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이미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옥중질문은 그의 사명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러 달에 걸친 옥중생활로 마음이 지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당장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헤롯 왕가를 물리치고 자신을 구해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7:19-20).

(2)   어느 사이에 세례 요한은 세상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선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의 제국인 로마나 이두매 출신의 헤롯 왕가를 징치하는 것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루는 방법이 되지를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모세의 시대에 애굽에서 벌써 있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는 애굽 제국을 징벌하고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입니다”.

(3)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로 인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 산에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았습니다(19:5-6). 그러나 그들은 가는 곳마다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15:24, 16:2, 17:2). 드디어는 자신들의 힘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없다고 불평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무시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14:4-5, 10). 그러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보아야 결과는 뻔합니다.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며 아브라함처럼 멸망을 당하게 되는 이방도시를 구원하기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는(18:23-32) 거룩한 백성의 모습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이 사례가 그러한데 세례 요한은 옛날의 시행착오를 다시 반복하자고 예수님께 독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앙적인 실족이 세례 요한에게서만 발생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 오랜 광야생활을 통하여 금욕과 고행, 경건생활에 박차를 가해온 세례 요한입니다. 그러한 그가  그와 같은 잘못된 생각에 빠져들고 있다면 그것은 장차 모든 사도와 제자들에게도 발생할 있는 것입니다.

(5)   따라서 차제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시고 계십니다; “광야생활과 같은 금욕과 경건생활이 필요하지만 결과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에서 벗어나는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신앙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7:24의역). 마디로, 마치 낙타나 무소처럼 시종일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복음사역에서 벗어나 선민의 영광이나 제자의 영광을 세상에서 추구하지 말라고 하는 엄중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 있느니라”(7:25);

(1)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십니다. 세례 요한은 외세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쫓아내고 가나안 땅에 다시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임금으로 메시아인 예수님이 등극을 하게 되면 앞에서 정치를 하는 자는 세례 요한이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꿈꾸고 있는 그와 같은 세상나라는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천손의 자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백성들이 수없이 많이 있고 제국의 황제치고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7:25).

(2)   그런데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고작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고 나라의 주인으로 등극을 한다고 하면 세상에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여전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탄과 악한 영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세상에서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헤매고 있을 뿐입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움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계속 사로잡고 있게 됩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아의 복음사역의 모습이 결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니라”(7:26);

(1)   세례 요한이 이미 실천한 것과 같은 광야생활 금욕과 고행 그리고 경건생활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가지 있습니다; 첫째,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 메시아가 자신에게 필요한지를 깨닫고 제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메시아에게서 겸손하게 영적인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오랜 광야생활을 통하여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깨닫고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는 요단 강가의 마을에서 회개의 세례를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물세례를 주면서 백성들로부터 선지자로 불리게 됩니다(21:26).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강력하게 규탄하다가 그만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14:3-5).

(3)   따라서 세례 요한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겸손하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한 복음사역을 배울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결과 세례 요한은 옛날 선민들의 선지자들처럼 용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백성들의 잘못을 질책할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만민을 구원하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는 배움이 부족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보다 깨달음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과거 선지자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의 잘못을 꾸짖고 선민들의 하나님신앙을 바로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성격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세상제국에서부터 선민의 나라를 독립시키고 선민의 영광을 사해에 떨치는 것으로는 건설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세상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어두움이 지배하고 있는 사탄과 악한 영들의 세력권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삶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정확하게 배워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교훈을 주고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경우를 좋은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요한이 오랜 광야생활을 통하여 깨닫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만 옥중생활 가운데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영광을 다시 떨치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방법론인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선민들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이른바 출애굽과 광야생활의 반복 되고 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주의를 게을리하게 되면 애초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모습에서 벗어나게 되기가 쉽습니다. 세상적으로 성도의 영광과 자신들의 공동체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크게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이 제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을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 본문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