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74강(눅7:31-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7월 17일(주일)
선지자 요한과 메시아 예수님을 모두 배척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선민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결과 장차 어떠한 보응을 받게 되는가?(눅7:31-35)
본문의 말씀은 그 앞절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침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7:30).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구절입니다;
(1) 첫째, 바리새인들은 주로 레위인들이며 그들은 제사장 출신 마카비가 주전 167년에 그의 용맹한 5아들과 함께 독립전쟁을 시작했을 때부터 생사를 함께한 자들입니다. 당시 시리아 셀루시드 왕조는 동진해오는 로마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헬레니즘적인 하나의 종교로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의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일신 여호와만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정책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제우스 신상을 예루살렘성전에 모시고 이스라엘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돼지의 피로 희생제사를 드리며 그 고기를 삶아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먹도록 강요하고 있는데(레11:7-8) 어떻게 그 정책에 반대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2) 둘째,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율법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전 142년에 출범한 마카비 아들의 하스모니안 왕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비의 아들과 그 자손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대 제사장과 왕의 직책을 모두 수행하고자 합니다. 정치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권력을 전부 장악하고서 강력하게 정복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명분은 시온의 영광과 여호와의 영광을 떨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선민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의 이방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마리아로 쳐들어가서 세겜 근처에 있는 그리심성전을 파괴해버렸습니다(요4:20-21). 이어서 이방나라 모압과 암몬 그리고 에돔까지 쳐들어갔습니다. 아예 호전적인 에돔족속들에 대해서는 거의 인종청소를 했습니다. 완전히 항복을 하고 유대교인이 되겠다고 투항을 하는 자들만 살려두었는데 그들이 유대땅 남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이두매 사람들입니다(막3:8).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하스모니안 왕조와 뜻을 같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훗날의 회교도와 같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경전을 들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정복전쟁을 통해서 이교도들을 인종청소하는 것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바리새인들이 정확하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셋째,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르치고 있는 율법교육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노력을 하여 히브리정경 전체에 대하여 주석을 만들었습니다. 그 주석에는 히브리 사상과 전통적인 전승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생활율법적인 세칙들이 일일이 들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생활을 그들의 주석으로 통제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율법교육을 받게 되는 모든 백성들은 구약의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삶을 실천하기 위하여 꼼짝없이 바리새인들이 해석하고 세칙으로 정해놓은 규범을 온전히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막7:8-9). 그런데 그 내용은 두 가지의 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선민우월사상과 선민만의 구원사상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 율법을 준수한다는 생활규칙을 지키게 되면 현세적인 축복을 여호와로부터 풍성하게 받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요컨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규정하고 있는 생활율법을 백성들이 잘 따를 수 있도록 그 속에 민족우월적인 선민구원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을 엄청나게 넣어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소위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마16:11-12).
(4) 넷째, 그렇게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히브리정경에 대한 주석과 생활율법이 자신들의 신이 되어버렸기에 바리새인과 율법선생인 랍비들은 도저히 다른 사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의 마을에서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므로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고 외쳤지만 그 말에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눅7:30, 33). 그리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대해서도 동의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눅7:31-32, 34). 그것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또한 하나님의 사자인 선지자나 메시아 앞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해석과 교리의 체계가 더욱 완전한 것이므로 자신들은 그것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롬10:2-3). 자신들이 신앙적으로 더 어른이며 더 거룩한 자라고 하는 자만심이 넘치고 있습니다(눅18:9-12). 과연 그들을 구원하고자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앞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신앙에 있어서 어른일 수가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는 오히려 어린아이가 되어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영적으로 받아 들여야만 하는데(눅7:35) 그것이 불가능해져버린 자, 하나님 앞에서조차 목이 뻣뻣해져버린 자들이(출32:9) 바로 바리새인들이며 랍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부터 한 구절씩 검토해보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1-32);
(1)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열심히 복음사역을 하시고 있습니다.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복음사상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라고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백성들에게 영과 육이 강건하도록 치유의 사역을 겸해서 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도 쫓아내어버리십니다. 그러자 꽤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구속자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게 됩니다.
(2) 하지만 그와 같은 사태를 대단히 염려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율법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랍비들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율법교육의 내용 곧 선민구원사상 및 현세축복사상과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이 영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선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방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방인들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들이 믿음의 백성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마5:43-48).
(3) 그래서 예루살렘성전의 산헤드린 대 공회는 서기관과 랍비 등 바리새인들을 급히 갈릴리로 파송하여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감시하고 있습니다(눅5:17, 6:7). 그리고 가는 곳마다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율법위반이라고 헐뜯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이므로 히브리정경의 말씀과 그 의미의 파악에 노련하지 못한 백성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1-32);
(4) 누룩과 같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이 백성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어서(마16:11-12) 마치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의 사람들처럼 하나님말씀의 본뜻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마13:57-58). 그러므로 아무리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주어도 동의를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선민만이 구원의 대상이지 어떻게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상이냐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구원을 위하여 이제 천국의 문이 열리고 있다고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와 대속의 역사섭리를 예언으로 설명해주어도 백성들이 별로 기뻐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현세적인 축복이 그들에게 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5) 비록 죄 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한평생 복을 많이 받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말씀해석이 빗어놓고 있는 참담한 결과입니다. 그와 같은 세태를 보시고서 예수님께서 한탄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만민구원사상과 현세축복사상이라는 잘못된 교훈 때문에 그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제는 목이 뻣뻣해지고 머리가 기형적으로 커져버린 어른이 되고 말았구나!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듣고서도 전혀 고개를 끄떡이지를 못하고 기뻐하지를 아니하고 있구나!”(눅7:31-32 의역).
둘째로,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눅7:33);
(1)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먼저 온 선지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미리 준비하여 이 땅에 천국이 임하도록 해야만 할지 자신의 사역의 방향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는 먼저 자신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마치 엣세네 사람들처럼 일찍부터 고행에 나서고 있습니다(눅1:80).
(2)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의 마을에 처음 나타나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했을 때의 모습은 떡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일체 마시지 아니한 나실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민6:2-5). 그 모습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은 회개의 물세례를 받으라고 강조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비판했습니다. 광야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메뚜기나 먹고 석청만 마시고 살더니(마3:4) 그만 정신이 이상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3) 애초부터 고행과 금욕생활을 통하여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깨닫고 자신들만의 구원을 얻겠다고 속세를 떠나버린 엣세네 사람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엣세네 파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 세례 요한이 반가울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엣세네의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눅7:33).
셋째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7:34); 바리새인들의 신앙상의 문제점은 크게 보아 두 가지입니다;
(1) 첫째, 스승과 제자로 대를 이어가면서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히브리 사상과 히브리 전승으로 해석하여 주석을 완벽하게 만들게 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모두 파악하여 집대성할 수가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세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의 지혜를 대신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교만입니다.
(2) 둘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가르치며 또한 그들에게 율법생활을 잘 하도록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보니까 자신들도 모르게 선민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현세적인 축복과 민족우월사상을 그 속에 누룩으로 넣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한 교훈을 대를 이어가며 계속 가르치다가 보니까 그만 자신들도 전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3) 따라서 이제는 바리새인들과 선민들이 율법생활을 사람들이 보기에 잘 하기만 하면 자신들은 모두가 구원을 얻고 현세적인 복을 누릴 수가 있다고 하는 외식적인 신앙사상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의 모습이 거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사상,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굉장히 비판적입니다.
(4) 구체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생활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눅18:12). 그런데 예수님 일행은 먹고 마시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눅7:34a).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시하고 있는 자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습니다(눅7:34b). 예를 들면, 이스라엘에 반입이 되고 있는 외국의 물품에 대하여 높은 관세를 부과하여 그것을 거두어 로마황제에게 모두 바치고 있는 민족반역자이며 제국의 앞잡이인 세관원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눅5:29-30). 그리고 창녀와 같은 여자들과도 대화를 하고 있는 예수님 일행입니다(눅7:36-40, 요8:7-11). 그들은 도저히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거나 가르칠 수가 없는 자들이라고 바리새인들이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7:35);
(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비롯한 그 제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마10:1-8, 눅10:17-20, 요4:2).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최대의 고민거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해답은 이미 바리새인들이 좋아하고 있는 히브리정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 대왕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었기 때문입니다”(삼하6:12-23).
(2)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언약궤는 여호와의 임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신령함과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인이신 여호와 앞에 서면 자신은 한갓 어린아이와 같다는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도이며 모든 율법의 시작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지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우주를 경영하시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눅7:35).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사랑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의 정신입니다(막12:30-31). 그 사실을 바리새인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본과 근본을 놓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신앙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안스러울 따름입니다.
결론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니이체가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디오니소스의 신처럼 어린아이가 되어서 자신의 운명과 처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며 즐기고 춤을 추는 자가 되어라.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삶의 방식이며 이 세상을 이기는 초인이 되는 길이다”.
비록 니이체가 하나님과 교회생활 사이의 신앙생활의 불일치에 환멸을 느껴서 실존주의 철학을 평생 추구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창조주가 설정한 자신의 고난과 운명 앞에 한갓 어린아이처럼 뛰놀며 살아가기를 원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세상과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생기를 활력으로 삼아 자신의 운명과 고난을 이기는 초인처럼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했던 니이체의 모습에 견주어 보면,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더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조물인 인간의 전통적인 지혜와 경험론적인 지식으로 모두 터득했다고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그리스도 앞에서조차 유대교의 교리에 밝은 자신들이 종교적으로 더 어른이라고 자부하면서 함부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비판과 비난을 서슴치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올바른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은 어린아이라는 사실부터 인정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본문의 뜻을 깨달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호와의 종인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다시 한번 말씀 앞에 겸손한 신앙인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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