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76강(눅7:39-4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7월 19일(화)
모두가 죄인이며 상대적인 차이만 있을 뿐 절대적인 차이는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눅7:39-43);
막달라로 짐작이 되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눅7:36, 43). 같은 갈릴리 지역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는 선지자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갈릴리 지역에서 공생애를 보내시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놀라운 치유사역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 지역의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 많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시고 있는 예수님에게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나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고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있습니다(눅7:37, 38c). 먼저 울면서 눈물과 함께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눅7:38a). 깨끗해진 발에 키스를 하고 향유까지 붓고 있습니다(눅7:38bc). 그 광경을 보고서 본문에서와 같이 그 집의 주인인 바리새인 시몬은 내심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눅7:39).
왜냐하면, 그 여인은 그 마을에서 죄인취급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눅7:37). 그러므로 바리새인 시몬은 선지자 예수가 자신의 발을 씻기도록 그 죄인인 여자에게 허용하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선지자이므로 당연히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인 여인이 함부로 접근하여 의인인 자신의 발을 눈물과 머리털로 씻기고 키스를 하며 향유를 붓는 것을 그만 두도록 불호령을 내리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평소에 히브리정경과 주석을 공부하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 자신도 의인입니다(눅18:9-12). 자신이 그러한 경우를 당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죄인인 여인의 행동을 즉시 물리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을 가까이하고 있다니 무언가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시몬은 비록 예수님이 능력은 많지만 그 사상이 좀 이상한 소위 불건전한 종교지도자가 아닌가 하여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습니다(눅7:39).
그와 같은 바리새인 시몬의 생각과 행동을 꿰뚫어보시고서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을 비유로써 전해주시고 있습니다(눅7:40-43).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7:39);
(1) 바리새인은 사람을 이분법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정경과 주석을 공부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있는 자는 의인입니다. 반면에 그러한 율법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이방인들과(막7:28) 선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자들은 모두 죄인들입니다(마9:9-11).
(2) 의인은 죄인과 상종하지 아니해야만 합니다. 죄인과 접촉하게 되면 부정을 타게 되기 때문입니다(창43:32, 요4:9). 그것은 마치 헬라인들의 원시적인 영지주의와도 비슷합니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영의 세계와 보이는 육의 세계로 양분하여, 전자는 후자를 만든 지혜와 진리 그리고 창조의 능력이 있는 본질의 세계이고, 후자는 전자가 지혜로 창조해놓은 피조세계이며 허상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3) 선민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유대교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며 의인들이므로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축복을 누리며 그 반면에 죄인들은 저주를 받아 멸망의 대상이 되고 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분법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라면 당연히 의인이므로 죄인의 접근을 물리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지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는데”(눅7:40-41);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눅7:40).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부드러운 비유입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 곧 채권자에게 두 사람의 채무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빚이 500일 동안 일을 해야 갚을 수 있는 500데나리온입니다. 또 한 사람은 그것의 1할에 불과합니다. 50데나리온만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눅7:41의역). 두 사람은 그 채무에 있어서 10과 1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결국은 모두 채무자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셋째로,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7:42-43);
(1) 두 사람의 채무자는 똑같은 형편에 처하고 있습니다. 채권자의 돈을 아무리해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둘 다 없다는 것입니다(눅7:42a). 그래서 그 자비로운 채권자가 동시에 두 사람의 채무를 모두 없애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빚이 전부 탕감이 되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눅7:42b).
(2) 그와 같은 비유의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이 자상하게도 바리새인 시몬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그 탕감을 해준 사람을 더 사랑할 것인가?”(눅7:42c). 참으로 쉬운 질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시몬이 당장에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많이 탕감을 받은 자가 더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당연히 더 사랑을 할 것입니다(눅7:43a).
(3) 예수님께서 정답을 말해준 바리새인 시몬을 칭찬하십니다; “네 판단이 옳다”(눅7:43b). 그런데 문제는 그 비유의 의미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아직 한번도 생각해보지 아니한 하나님의 진리가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자를 돌보고 살리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지를 못합니다. 상대를 해치더라도 자신만 우선적으로 살고자 하는 투쟁의 의지가 충만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살기다툼입니다.
(4) 선민이라고 하여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자신들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속죄의 제사의 혜택을 누리고자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배우라고 선교하지를 않습니다. 더구나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서의 사명을 멀리하고 있습니다(출19:5-6, 욘1:1-3, 마12:39).
(5)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 옛날에 이방지역 가나안 땅에서 선지자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신앙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창20:7). 심지어는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주민들의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창18:23-32). 그런데 그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후손들이 전혀 따르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율법생활을 잘 하고 있는 의인들이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이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게 된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의식이 조금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일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절대적인 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 부자청년에게 자신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18:18-19).
그런데 어이가 없게도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이 의인이며 선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그 여인이 식사 중에 있는 선지자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발을 만지고 있는 행위는 부정을 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죄인인 여인의 접근을 허용하면서 자신의 발을 내맡기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잘못된 선지자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와 적게 탕감을 받은 자의 차이에 대하여 비유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많이 탕감을 받은 자가 채권자를 더 사랑할 것이라는 바리새인 시몬의 답변까지 옳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많이 탕감을 받은 자가 누구일까요? 자신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께 감격하여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라주고 있는 그 여인입니다. 적게 탕감을 받은 자는 누구일까요?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자칭 의인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마치 자신은 의인인 것처럼 위선과 외식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참으로 불경스러운 신앙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너나없이 자신의 신앙태도를 다시 한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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