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75강(눅7:36-3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7월 18일(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인데 어째서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식사초대에 응하시고 계시는가?(눅7:36)
랍비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하고 있다고 하여 예수님이 그들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대하거나 멀리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 모두가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서 그들을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아버지 하나님이 돌보시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을 버리고 모른 체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해치려고 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조치하실까요? 그 대목에 대한 답이 다음과 같이 복음서에 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12:8-10).
풀이를 해보자면, 말로써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만 다른 모양으로 해치려고 하는 자들은 사하심을 얻지를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해서 자신들이 숭배하고 있는 유대교리와 틀리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용서함을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요19:11).
바리새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인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듣고 싶어서 조용히 식사초대를 하고 있는 갈릴리 지역의 바리새인 시몬의 이야기가 실리고 있습니다(눅7:36, 43). 그리고 요한복음 제3장에서는 예루살렘 근처에 계시는 예수님을 밤중에 은밀하게 찾아온 존귀한 바리새인 곧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원인 니고데모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요3:1-15).
그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역시 호의로 대하시고 계십니다. 자신을 초대하거나 찾아와서 천국복음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데 그것을 마다할 리가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이 다음과 같습니다; “(갈릴리 지역에 살고 있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눅7:36).
그 동네에서 죄인취급을 받고 있는 한 여인이 그 식사자리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을 붓고 자신의 눈물과 머리털로 발을 씻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7:37-38)
의사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공생애 전반기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사방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기록은 갈릴리의 어느 마을에서 발생하고 있는 오찬모임의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는 유대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갑자기 바리새인 시몬의 집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리고 그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기고 있습니다(눅7:37-38). 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의사 누가는 그 실마리를 바로 다음 장인 제8장 앞부분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눅8:2). 악한 귀신이 일곱이나 들어 있는 여자가 그 때문에 병이 들어서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는 마을 막달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치부가 되고 죄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예루살렘으로 진출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나 귀신이 들고 몸에 병이 중하여 고향 막달라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매우 흔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고향 이름을 그 앞에 넣어서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병을 예수님께서 이미 고쳐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7귀신을 쫓아내시고 그녀가 고향에서 사람 구실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재물을 바쳐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돕고자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눅8:1-3). 그녀는 자신을 고쳐주시고 죄 사함을 주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께 대하여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웃에 살고 있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점심식사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듣자마자 자신이 아끼고 있던 옥합을 꺼내어서 그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부음 사건과(눅7:36-48)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사건이 같은 공관복음에서 익명의 여인에 의한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마26:6-13, 막14:3-9).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부음이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기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익명의 여인은 후반기에 등장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의 발생장소가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다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4복음서를 작성하면서 사도 요한은 베다니 마리아도 역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기 위하여 자신의 옥합을 깨뜨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12:3-8). 베다니 마리아는 일전에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무덤에서 되살려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너무나 고와워하고 있습니다(요11:31-44). 그러던 차에 마리아는 베다니 자신의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자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세 차례나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마16:21, 17:22-23, 20:18-19).
따라서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제사인 줄 알고서 그 죽으심을 거룩하게 기억하기 위하여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으로 보입니다(요12:7). 베다니 마리아의 그 마음은 역시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있는 그 익명의 여인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26:12),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
바리새인과 죄인인 여자의 이야기가 발전하면 어떠한 비유적인 가르침이 되고 있는가?(눅18:9-14)
바리새인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생각하고서 인생을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신앙생활의 본을 사람들에게 보이기에 열심입니다(눅18:11-12).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빠짐없이 바치고 있습니다. 율법의 조항은 비록 세세한 규정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성전이나 회당에서 하루종일 예배를 드리고 히브리정경을 회중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정경에 대한 자신들의 주석을 공부하기에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가르칠 수준이 되면 율법선생인 랍비로 불리게 됩니다. 그렇게 랍비로 생활을 하다가 히브리정경에 대한 말씀해석이 매우 뛰어나 평판을 얻게 되면 산헤드린 대 공회에 교법사로 들어가게 됩니다(행5:34). 대 공회에서 종교재판을 할 때에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공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유권해석을 하기 때문에 마치 왕정시대의 서기관이나 에스라 시대의 율법학자와 같은 서기관으로 불리고 있습니다(행23:9).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정경을 모두 공부하고 있습니다(행23:6-9). 반면에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장로들 곧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히브리정경의 말씀이나 율법에 관하여 유권해석을 전반적으로 할 수 있는 자들은 바리새인 출신인 율법학자 곧 서기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 당시에 가장 뛰어난 교법사가 바로 가말리엘이라고 하겠습니다(행5:34-40, 22:3).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주석을 고집하고 선민사상과 현세축복사상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과 영생구원의 복음사역과는 어긋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예수님 일행에 대한 반대가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세리나 죄 많은 여인들과 가까이하시는 예수님이 영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바리새인들의 신앙태도와 사고방식이 더 문제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며 거룩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회개할 줄을 모르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로 그 바리새인의 집에서 죄인인 여자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눅7:36-38).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시각과 그 집주인 바리새인 시몬의 시각이 상반되고 있습니다(눅7:39-40). 그와 같은 생각의 차이를 제자들에게 알기 쉽게 훗날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이 소위 ‘바리새인과 죄인인 세리와의 비유’입니다(눅18:9-14). 그것을 의사 누가가 빠뜨리지 아니하고 그의 복음서 뒷부분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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